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논문 5편 담은 『한국학』 2022년 봄 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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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논문 5편 담은 『한국학』 2022년 봄 호 발간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3.20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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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 종로구 소녀상을 중심으로 풍경의 의미를 탐색한 논문 등 흥미로운 5편 논문 소개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학 분야의 대표적인 학술지 『한국학』 2022년 ‘봄 호’를 이번 달 발간했다.

『한국학』은 『정신문화연구』라는 제호로 1978년 창간된 이래 한국학 분야의 쟁점과 이슈, 해외 한국학 동향, 한국학 저술에 관한 서평 등 다양한 한국학 관련 연구성과를 발표해 오고 있다. 2004년,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로 선정되었고, 현재 국내외 300여 개의 학술연구기관 및 도서관에 배포되어 권위와 신뢰를 가진 한국학 연구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역사, 철학, 어문, 민속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각자 문제의식을 갖고 집중적으로 탐구한 연구결과 총 다섯 편을 발표했다. 

▶ 그 중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해결 촉구를 위해 1992년 시작해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수요시위’와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고 올바른 역사 인식 확립을 위해 2011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한 ‘소녀상’, △그리고 건물 신축을 위해 2016년 ‘주한일본대사관을 철거한 후 중학동의 모습’까지 특정 공간에서 빚어진 사회·정치적 풍경의 변화에 집중한 가톨릭관동대학교 최희전 교수의 논문 <풍경은 어떻게 변하는가?>에 특히 눈길이 간다.

【논문 요약】 

이 논문은, 장소 특정적 설치물인 소녀상이 그 특정 장소를 잃게 되었다고 상정되는 2016년 주한일본대사관의 철거 이후, 중학동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빚어지는 사회·정치적 풍경의 변화에 집중하여 이 질문 ‘풍경은 어떻게 변하는가?’에 답한다. 이때, 물리적으로 철거되었으나 환유적으로 남아 존재하는 주한일본대사관은 한·일 양국의 해결되지 않은 역사에서 파생한 낙진으로, 소녀상은 이 낙진의 온전한 처리를 촉구하는 상징으로 독해한다.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이 논의의 끝이 가리키는 것은 ‘-되어간다’는 동사적 역학 속에 존재하는 유기적 복합체로서의 풍경이다. 

이 논문에서 풍경은 사회·정치적 자극에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며, 풍경 속의 것들과 풍경 밖의 것들을 변주하며 풍경을 확장·구성한다. 소녀상은 중학동 풍경을 넘어, 국가적, 민족적, 문화적, 그리고 이념적 경계를 가로지르며 움직이는바, 소녀상을 둘러싼 풍경이 다채로워짐에 따라, 그것의 의미 또한 다층화됨은 물론이다. 풍경에 대한 이 논의에는 ‘참여하는 신체’, 인간 역시 포함된다. 풍경이란 결국 인간 실천의 흔적이자 인간 실천을 포용하는 거대한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에 남겨진 과제는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요컨대, 최 교수는 해당 논문을 통해, 주한일본대사관 건물이 2016년 철거되고 다른 장소로 임시이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남겨진 소녀상을 통해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주한일본대사관의 존재와 부재의 이중 속에서 소녀상 주변의 풍경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모색하고자 했다. 아울러 ‘장소 특정적 미술’ 에 대한 논의를 넘어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 갖는 의미의 확장을 한국 근현대 역사를 통해 조망하고 있다. 

이 외도 다른 4편의 연구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김선숙 국학연구소 연구원의 <신라 중고기 율령의 정치적 공공성에 관한 시론>에서는 율령이 백성들의 일상에 국가권력을 직접 침투시키는 과정이라고 전제하며, 율령 제정 및 반포가 사회 공동체로서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현상으로 해석하고 규범의 사회통합적 기능에 주목한다. 

【논문 요약】

율령은 왕권의 강화와 함께 백성들의 일상에 사적으로 운영되는 상위지배층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대신 국가권력을 이들에 직접 침투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에 있어서 율령의 성립과 제정은 결과적으로 신라사회가 공동체로서 어느 정도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신라 공공성의 구현주체가 국가와 왕이라고 볼 수 있으며 수혜자 역시 국가와 왕인데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일반민(백성)이 포함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라의 율령은 공공성을 도모하기 위한 구체적 정책의 구현으로 어느 정도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신라는 권력이 일부 왕을 비롯한 소수의 지배층에게 집중된 정치체제를 가진 봉건적 시대의 사회로서 율령의 성립과 제정이 절대자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사회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고대의 율령은 공공성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과 거리가 있으며 근·현대의 서양에서 성립된 공공성의 이상에는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구는 각각의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사회인식이라든가 정치체제 등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따라서 국가를 형성하는 구성원 내에서는 소수의 권력독점에 대한 끊임없는 반발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소수의 권력자는 이러한 반발을 억압하고 무마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정치적 공공성은 사적 권력의지나 이해관계들과 대립하는 가운데 도모되는데 소수의 권력자는 이를 확대해 나가는 사회체제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율령은 각 집단 간 또는 지역 간 분산되어 있던 관습법을 포괄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국가 전체에 작용하는 일원적인 공법체계(公法體系)의 수립과 그러한 법체계가 성립하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으로서의 중앙집권적 권력이 점차 확립되어가고 있었을 때 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흥왕대 신라 율령의 반포는 이전 시대보다 좀 더 공공성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발판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그만 큼 이전과 다른 사회질서가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정화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책임연구원은 <유교 예학(禮學)의 시선으로 본 고려 초 지배층의 효 사상 고찰>을 통해 유학의 효(孝)와 충(忠)은 가문과 군주 간 일종의 사상적 계약이며, 효와 충이 사상적으로 서로 연결된다는 기존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가문의 정신이 자손에게 영향을 미쳐 다시 충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면서 효의 선순환적 현상을 밝히고 있다.

【논문 요약】

이 논문은 ‘예학적 시선으로 보았을 때, 유교의 본원적인 ‘효’ 사상을 미계몽 상태였던 일반 민중에게까지 포괄적 이면서도 똑같은 잣대로 적용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진행한 탐구이다. 이전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논할 수 있는 유학 사상에서의 ‘효’의 정의는, ‘부모에 대해 엄숙함(敬)으로써 하는 마음과 자세를 바탕으로, 부모가 해 오신 훌륭한 일을 잘 계승함 또는 잘 계승한 자’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에 의해 유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도(道)’ ‘덕(德)’적 완전체를 지향하며 수양하는 길을 걸어간 그 부모를 계승한다는 관념은 고려 시대 일반인들의 관념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고려의 유교적 ‘효’ 사상에 대한 섬세한 논의 진행을 위해 한·당 이전의 유학경서를 폭넓게 참고하였다. 고려 위정자들이 ‘나라를 잘 다스림의 근원’으로 삼은 것은 유학이었다. 고려 초 성종의 교령에서는 나라와 가정을 잘 다스림에는 근본을 가장 먼저 힘써야 하는데 근본을 힘씀에 ‘효’만한 것이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원시 유학에서는 멸망한 나라를 보존시키고 끊어진 공실을 이어가게 해주는 ‘존망 계절(存亡繼絶)’ 관념을 왕도 사상 속에 녹여내고 있다. 태조 왕건이 멸망한 발해의 후손에게 해준 시혜는 바로 그것의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논의 된다. 초조와 선조에 대한 제례는 효손(孝孫)으로서의 계승 관념의 하나이다.

고려 위정자들이 생각한 치국의 근본은 바로 유학에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하여 성종은 미래의 동량이 될 수 있는 사·서(士庶)들에게 효행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는 그들에게 훌륭한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유교적인 소양과 인품을 갖출 것을 요구한 것이다.

충효 사상의 시작은 원래 민중에게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이념적인 복종을 종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가문과 최고통치자 상호간 일종의 사상적 계약이었다. 대대로 이어온 선조의 훌륭한 뜻과 가문의 정신을 계승한 자손의 선순환이 바로 유학적 ‘효’ 사상의 본질이며, 그 속에서 모든 위정자의 ‘충’ 이념도 따라온다.

김태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역대 한시 유수대(流水對)의 창작 양상>은 국내 연구가 전무한 한국 한시(漢詩)의 유수대(流水對)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한시의 작법 중 하나인 유수대를 “흐르는 물처럼 유동하는 기세가 느껴지는 예술적 장치”라고 정의하고, 유수대 방식으로 창작된 다양한 시가(詩歌)를 소개한다.  

【논문 요약】

유수대(流水對)는 출구(出句)와 대구(對句)가 상호 필연적 관계로 의존하고 있어서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함부로 생략할 수 없고 또한 그 순서가 특수한 논리적 관계에 따라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어서 전후의 위치를 함부로 도치시킬 수 없는 대우(對偶)를 말한다. 이러한 대우는 인공의 의미를 이미 벗어난 천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모든 대우의 예술적 이상이다.

출구와 대구에 작용하는 상호 의존의 필연성은 모든 유수대의 본질적 원리다. 평행(平行對)대와 마찬가지로 유수대도 배열의 균제를 보이기는 하지만, 유수대의 핵심적 기제는 의미의 연관이다. 흐르는 물처럼 유동하는 기세가 여기서 나온다. 유수대는 평행대를 잇달아 사용하는 데서 생기는 부자연성과 정체성의 폐단을 소거하는 예술적 장치다. 유수대의 창조적 활용을 계기로 근체시 양식의 예술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수대와 평행대는 상보적 기능을 맡는다. 유수대는 대치하지 않고 유동하는 까닭에 합장이 아예 불가능하고 또한 공대를 이루기 어렵다. 유수대의 이러한 예술적 성격을 모르면 율시의 본질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이 논문에서 고찰한 단구형 유수대 3종류와 복구형 유수대 7종류는 최소한의 것이다. 향후에 더욱 자세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하겠다.


최진아 한양대학교 교수의 <조선시대 밀양지역 성황신앙의 위상과 종교에 미친 문화적 영향력>에서는 고려 개국공신 손긍훈(孫兢訓)이 조선시대 밀양에서 성곽지역의 수호신인 성황(城隍)으로 추앙된 배경을 추적한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성황이 지역 수호신으로 신앙되어 무속의 신으로 수용된 사례가 일반적인 데 반해, 불교사찰의 수호신으로 추앙되는 손긍훈 사례를 통해 성황신앙이 종교에 미친 문화적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논문 요약】 

이 연구는 조선시대 밀양지역에서 손긍훈(孫就訓)이 성황으로 추존된 배경과 그 위상, 그리고 지역 종교에 미친 문화적 영향력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황신앙(城隍信仰)은 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중국에서 수용되어, 고려시대에 국가와 지방 토호세력에 의해 추앙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유지되었다.

밀양지역에서는 손긍훈을 추앙한 성황이 고려부터 조선까지 지역공동체를 위한 수호신으로 인정받아왔다. 손긍훈은 940년(태조23)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면서 고려개국공신의 그림을 그린 공신당(功臣堂)에 묘사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하나이다. 손긍훈은 고려시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광리군(廣理君)에 추봉되었는데,광리는 밀양의 옛 이름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시대 성황은 지역 토호세력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는 특징을 지닌다.

손긍훈 성황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한 영향력이 조선에도 지속되었는, 이는 손장군이라 칭해지며 지역공동체 수호신으로서 종교 체험담과 지역풍속 기록 등에서 알 수 있다. 전쟁에 참가한 지역병사들에게 음조(陰助) 신으로 나타난 점, 근심거리가 있는 지역민들이 성황사를 찾았다는 점, 지역풍속에 무격을 좋아했다는 점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손장군 성황이 타 종교에 미친 영향력 등은 조선후기 운문사에 그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현재까지도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의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또한 태조 왕건과 연관되며 한국 전통사회에서 성황이 지역수호신으로 신앙되어, 무속의 신으로 수용된 사례가 일반적인 것에 반해 본 사례는 불교사찰의 수호신으로 추앙되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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