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흥망의 경제 논리…세계 근대사를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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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흥망의 경제 논리…세계 근대사를 다시 보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3.1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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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경제, 패권 | 리보중·웨이썬·류이·류징화·스인훙 외 7명 지음 | 도서출판 역사산책 | 392쪽

 

중국 최고의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지난 500여 년 세계사 속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분석했다. 복잡한 세계사와 국제관계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표면적으로 이 세계는 제국의 부상과 제국 간 군사적 갈등 과정에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세계의 발전은 경제 자원을 개발하고 부를 축적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펼쳐진 치열한 경쟁이 이끌었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시작점을 1500년 전후로 설정했다. 바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다가마Vasco da Gama 같은 유럽 항해가의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이 연결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15세기 말 이전에도 일정한 형식의 원거리 무역이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와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잘 알려진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는 고대 역사에서 일정 시간 동안 번창했다. 그러나 두 가지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 첫째, 빈번한 군사적 충돌로 인해 종종 길이 막혔다. 둘째, 당시의 선단船團이든 대상隊商이든 한 번에 운송할 수 있는 화물의 양이 제한적이었다. 이 힘든 무역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한 상인은 귀금속이나 사치품 등 부피는 작고 단위 단가는 높은 상품을 운송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물건은 각국 정부나 부자들만 관심을 갖고 구매할 수 있던 것이기에, 주류 소비자를 비롯한 전체 국가의 국민 경제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19세기 말에 이것이 가능했던 국가가 막 통일을 이룩한 독일이었다. 독일과 달리 당시 영국은 세 가지 측면에서 열세에 있었다. 첫째, 원가 요인을 고려하느라 영국 제조업은 응용 신기술과 신기계 측면에서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이로써 노동 생산율 면에서 독일에 뒤처졌다. 둘째, 영국 본토의 인구가 독일보다 적었다.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식민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효과적이면서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식민지 인구와 자원을 재빨리 전환시켜야만 독일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 셋째, 영국이 맡고 있던 전 세계적인 의무가 실제로 매우 중요하고 복잡해 상당 부분의 자원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두 가지 정책으로 독일의 도전에 대응했다. 우선, 1907년부터 영국은 오랜 기간 전략적 라이벌이던 러시아, 프랑스와 화해를 맺는 등 전 세계적 범위의 의무를 대폭 축소하고 유럽 대륙 주변으로 역량을 집중해 독일에 맞섰다. 그다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여러 차례에 걸친 노력으로 마침내 유럽 밖에 있던 강대국 미국을 유럽 정치에 끌어들여 전 세계 경제와 강대국 간의 경쟁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영국, 서유럽 대륙 국가와 비교했을 때 미국, 이후의 소련, 나아가 중국은 그 잠재력에서 완전히 다른 등급에 놓여 있는 국가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특히 서유럽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하고 인구도 가장 밀집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자연국경에 따른 면적의 제약으로 그들의 잠재 전략은 이미 상한선에 도달한 상태였다.

수천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영국, 프랑스, 독일이 선진국으로서 크게 앞서 있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해외 식민지를 제외하면 개발할 수 있는 잉여의 토지가 없고 공업 생산 규모와 노동력 모두 상한선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소련, 중국은 개발될 수 있는 유휴 토지가 많았고 인구 또한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중국 같은 국가의 잠재력은 서유럽 국가보다 우위에 있었다.

미국, 소련, 중국이 대륙급 강대국에 속한다면, 당시 서유럽은 설령 고도로 완비된 선진국이라 해도 중등 강국 정도로 볼 수 있다. 대륙급 강대국이 일단 중등 강국의 경기장으로 들어온다면 전 세계 경제에서 경쟁의 규모와 격렬함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940년 여름에 독일은 서유럽 대륙을 거의 점령해 그 세력이 정점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독일과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총발전량과 비행기 생산량은 소련에 비해 단지 20퍼센트 정도만 높았을 뿐이다. 그때 소련은 주요 강대국 가운데서도 산업화 정도가 비교적 낮고 경제력도 약한 국가로 여겨졌다.

또 다른 예를 보자. 1941년에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해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처까지 도달함으로써 독일군의 진공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마주하는 저항의 강도도 아주 약했다. 그러나 이 6개월 동안 탱크, 장갑차, 트럭, 병력 등 독일의 군사 장비가 개전 때와 비교해서 3분의 1이 손실되었다.

이 예는 대륙급 강대국이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넓은 영토 자체가 우월점으로 작용해 중등 강국이 특히 역량이 있다고 여기는 전략 자원을 천천히 소모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유럽이 다시는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 양대 대륙급 강대국이 세계무대를 좌지우지하게 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제 경쟁 역시 매우 전형적인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 사이의 대립이었다. 미국은 각자 보유한 천연 자원과 시장경제 원칙에 기초해서 분업하는 글로벌 개방 경제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했다. 반면 소련은 유라시아 대륙 내부에 폐쇄적인 세력 범위를 건설해 그 세력 범위 내의 토지, 인력, 원재료 같은 자원을 개발하는 중앙 통제형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 경쟁의 최종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 소련의 산출량이 예상보다 훨씬 적은 것에 더해 전략 자원과 서로 맞지 않는 너무 많은 의무를 소련이 맡게 됨에 따라 결국 국가 해체로 이어지고 말았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미국도 소련과 유사한 과오를 범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와 같이 전적으로 군사 역량에만 의존해서 잠복해 있는 안보 위협을 제거하려 시도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전략 자원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국가가 미국에 기대했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러면 중국은 어떠한가? 지난 40년 동안 이어진 중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은 사실 글로벌 시장 개방과 경제체제에 상당 부분 힘입었으며 중국은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 변화에 따라 중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경제 활동을 하며 경우에 따라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여하를 막론하고 폐쇄가 아닌 개방을 유지하는 것만이 중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이 책은 역사상 강대국의 흥망에 관한 깊은 인식과 중국 경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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