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자와 정치행위 문제…배제와 공존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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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와 정치행위 문제…배제와 공존 사이에서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3.0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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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 | 한나 아렌트 지음 |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1,004쪽

 

이 책은 ‘유대인 문제’를 다룬 한나 아렌트의 글들을 엮은 모음집이다. 아렌트의 제자·친구·연구자들은 아렌트의 사후 미출간 원고를 수집하고 그의 저술 의도를 반영해 이 모음집을 유작으로 출간했다. 특히 이 책에는 아렌트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저술한 논설과 평론, 논문과 서평, 편지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어 무국적자 시절 정치 현실에 맞서 고뇌하는 젊은 날 아렌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언론인, 정치평론가로서 아렌트의 비판적 성찰을 엿볼 수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 문제를 조명하면서 정치 문제가 특정 집단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문제라는 점을 잘 드러낸다. 이 책은 ‘왜 유대인 문제인가’라는 특정한 질문을 ‘왜 정치인가’라는 보편적 질문으로 전환하고 이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제공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사유’란 특정한 정치 현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정신 활동이다. 정치적 사유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데 아렌트는 평생에 걸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고심했다.

아렌트가 말하는 ‘유대인 문제’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아렌트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를 정치적 문제로 삼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렌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유대인성을 자각했다. 그는 스스로 유대인성을 주장하면서 비방과 차별에 대응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과 같이 선천적으로 그의 존재를 이루는 요소였다. 그는 14세에 집 안 서재에 꽂혀 있는 칸트의 저작들을 읽고 ‘발생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욕구에 이끌려 유대인성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정립해나갔다. 아렌트는 정체성을 ‘변경하거나 부정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유대인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길 바랐다. 반유대주의의 한 형태를 통해 자신이 유대인임을 발견한 순간 자신의 유대인성을 옹호하도록 요구받은 것이다. 

1933년 2월 아렌트가 27세 되던 해 제국의회가 불타고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을 집권하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체코 국경을 넘어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나치당이 프랑스까지 진군하자 그는 이 책에 실린 에세이 「구스트로프 재판」(1936)과 「반유대주의」(1937 또는 1938), 몇 편의 박사학위 논문과 라헬 파른하겐 전기 초안 등의 원고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행위자로서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처럼 그에게 유대인성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매 순간 정치적 사유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유대인 문제는 개별 유대인, 유대 민족 및 국가의 정체성, 그리고 유대인 역사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 문제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료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렌트는 유대인 문제를 간명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 문제는 곧 민족 문제임을 시사한다. 그는 유대 민족의 근대 역사를 기술하면서 ‘국가 안의 국가’ 또는 ‘땅 없는 민족’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며 존재론적인 문제를 고민한다.

유럽의 재앙은 유럽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전체주의에 의한 유럽 국민의 정복 또는 유럽 문명과 전통의 붕괴이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600만 명의 학살이다. 이렇듯 유럽 역사에서 항상 주변적 위치를 차지했던 유대인 문제는 유럽의 문제가 되었다. 아렌트의 말대로 “반유대주의는 결국 전 유럽 세계의 파괴적인 소동의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의 역사적 과정은 유대 민족과 비유대인, 특히 유럽 민족 사이의 갈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아렌트는 『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 전반에 걸쳐 반유대주의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서유럽 유대인들은 대부분 동화를 통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유대인성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음에도 항상 유대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은 유대인 난민의 역설이었다. 유대인은 ‘어느 곳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민족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유대인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난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렌트는 시온주의의 등장 이후 1960년대까지 시온주의 역사, 특히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과 라자르(Bernard Lazare, 1865~1903)는 시온주의 운동의 제1세대이고,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아하드 하암(Ahad Haam, 1856~1927) 등은 제2세대를 대변한다. 개척자 운동은 제3세대에 속한다.

시온주의 보급 운동에 앞장선 헝가리 태생의 작가 헤르츨은 그의 작품 『유대국가』에서 “우리는 ‘꺼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디로? 아니면 우리는 어디에 머무를 수 있는가”라고 이야기하며 유대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드러냈다. 이전까지 유대인 문제는 ‘동화 문제’와 연계되며 개별 유대인이 직면한 ‘사회적 인정’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헤르츨 이후 유대인들은 유대인 문제를 사회적 인정 문제가 아닌 ‘정치 문제’로 이해했다.

아렌트는 1930년대 초반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유대인 문제가 정치 문제라는 점을 인식했고 그 정치적 해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렌트는 헤르츨의 정치적 시온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라자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헤르츨은 “반유대주의의 이미지로 시온주의를 고려하면서 반유대주의자들을 유대인들의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로 간주”한 반면 라자르는 “유대인 문제를 정치 영역으로 공개적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유대인 문제는 행위자와 정치행위 문제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치’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폴리스’에서 파생되었다. 폴리스가 정치와 연계되듯이 민족의 생존, 즉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공동체는 정치행위와 연계된다. 누가 폴리스를 구성하고 정치에 참여하며 그 폴리스의 형태는 어떠한지 알기 위해서는 유대인 정치 역사에 대한 아렌트의 기본 입장을 살펴봐야 한다.

아렌트는 ‘정치 없는 민족’이란 우울한 비극에 대응해 “유대 민족은 디아스포라 2000년 동안 직접적인 정치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조건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두 차례 가졌다”고 밝혔다. 첫 번째 시도는 1600년대 샤베타이 체비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파국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인 정치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다. 두 번째 시도는 시온주의 운동이었다. 아렌트는 이를 통해 유대 민족의 정치에 대한 희망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20세기 시온주의 운동을 주목하면서 두 차례 환멸을 경험했다. 첫 번째 환멸은 시온주의 운동이 아랍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을 때 나타났고, 두 번째 환멸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출간 당시 시온주의자들이 이 책을 격렬히 비판했을 때 나타났다. 아렌트는 이러한 환멸 경험으로 1964년 이후 유대인 정치를 핵심 연구주제로 삼지 않았다.

아렌트는 이들의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정치만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통의 붕괴로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심연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난간 없는 사유’를 강조했다. 비유하자면, 아렌트는 민족이 생존에 의존할 지지대가 없는 상황에서 난간을 마련하려는 새로운 모험과 도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렌트는 ‘역사 없는 민족’이나 ‘정치 없는 민족’이 겪어야 했던 재앙을 목격했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정치행위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 모음집에서는 ‘정치 없는 민족’을 성찰하면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정치 문제를 제기한다.

이 책에는 문제의 난관에서 벗어나는 돌파구를 찾는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가 깃들어 있다. 유대인 문제를 경험하고 이에 맞서 해답을 찾고자 했던 아렌트의 삶은 정치적 삶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통적 범주의 정치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나 자의식적인 파리아의 정신으로 해답을 찾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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