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품은 서경덕, 기와 이, 천지인의 혼연일체를 보다
상태바
자연을 품은 서경덕, 기와 이, 천지인의 혼연일체를 보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3.06 2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서경덕과 화담학파: 조선 중기 주자학의 도전자들 | 한영우 지음 | 지식산업사 | 412쪽

 

우리 철학사에서 기철학을 세운 화담 서경덕(1489-1546)과 그의 문인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역작이다. 저자 한영우 교수는 화담학파의 발자취를 조명함으로써 조선 중기 유학사의 새로운 흐름을 꿰뚫어 본다. 개성에서부터 넘어온 새 물결은 흑백의 모노톤이었던 조선의 문화, 사상계를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물들인다.

서경덕의 독창적 사유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그 원천으로 우선 그가 태어난 환경을 든다. 가난한 몰락양반가 후손으로 들판에서 뛰놀았던 서경덕은 문득 종달새가 나는 것을 보고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몸소 실천하여 이치를 터득한 일례이다. 그는 우주자연의 근본을 기에서 찾고 그 기가 움직이는 변화를 수학으로 설명하는 이른바 상수역학象數易學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저자는 그와 함께 서경덕의 고향 개성에 주목한다. 16세기 중엽 개성은 상업도시이자, 실용학(잡학雜學)과 도술이 성행하는 등 삼교일통문화가 꽃피는 토양이 되었다. “산술, 역학에 능한 과학자의 눈과 시인의 감성을 동시에 가진” 서경덕의 시와 학문은 여기서 탄생하였다.

저자는 『화담집』과 『송도기이』, 실록, 족보, 비명, 문집, 역학서 등과 〈서경덕유사〉 등의 야사를 통틀어 서경덕의 성품과 학문세계를 명쾌하게 밝힌다. 그가 남긴 여러 기록 가운데 특히 시는 서경덕의 진면목을 한눈에 보여 준다. 당대 최고 명신 김안국이 부채를 선물하자 지은 시에는 바람의 이치를 기철학으로 절묘하게 풀이한다.

누가 알까. 하나의 근본이 머리까지 꿰어 誰知一本當頭貫
문득, 뭇 가지 한 줄기에서 퍼졌네 便見千枝自幹張
형체가 부딪쳐 기氣가 와서 부풀려지니 形軋氣來能鼓吹
깊은 고요 속 홀연히 시원한 바람 생기네 有藏虛底忽通凉

49세 때 개성에서 서울로 잠시 근거지를 옮긴 서경덕의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제자들이 찾아온다. 당시 학도들이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배우는 서울의 학풍을 엿볼 수 있다. 다양한 실용학과 기술이 포함된 개성문화는 조선 중기 도학 일변도를 막으면서 다변화의 물꼬를 텄던 것이다. 이 새로운 지식공동체는 상수역학에 능하고 유불선 일통의 스승의 영향을 받아 화담학파를 이루었다. 저자는 이지함, 허균 이외에도 민순, 이구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제자들을 살피는 한편, 『서경덕 문인록』에 수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삶과 행적까지 추적한다. 이로써 실학의 뿌리를 켜켜이 훑는다.

누추한 띠집에서 때로 굶주렸던 그였지만, 그 누구보다 드넓은 세상 이치를 환하게 꿰뚫었던 현자, 서경덕. 그가 복숭아 지팡이를 짚고 곳곳에 뿌린 씨앗은 쇠락해 갔던 조선의 학풍을 되살리는 신선한 샘물과도 같았다. 저자가 평생을 두고 깊이 고찰하여 써내려간 화담花潭의 반향은, 실학의 연원을 새로 보는 데서나 기철학, 상수역학 등 철학사를 다시 쓰는 데 긴요한 주제와 자료가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