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언어가 사라진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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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언어가 사라진 대학”
  • 하상복 목포대학교·정치철학
  • 승인 2021.05.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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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아렌트(H. Arendt)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활동(activity)을 노동(labor)과 일(work)과 행위(action)의 셋으로 나누고 있다. 거기서 아렌트는 행위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뚜렷이 구분해내는,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만의 그 행위란 정치에 다름 아니다. 그럼 왜 정치가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활동인가. 정치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디자인하는 잠재성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지금-여기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현재적 시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생존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지난 과거를 불러낼 수 있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와 그리고 미래와 결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성과 당위성을 확보해나간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크손(H. Bergson)이 지속이라는 개념을 통해 통찰한 바다. 인간의 정치는 집단의 지나버린 시공간, 지금의 시공간, 다가올 시공간을 아우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회와 공동체를 상상하고 언어로 그려내는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행위는 유토피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정치 언어는 초월적 상징을 본질로 한다. 

행위로서의 정치세계에 유토피아를 향한 상상력과 언어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곳은 대학이었다. 그 점에서 대학은 현실, 질서와 같이,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 못한 확정된 언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다. 우리는 1960년대 유럽의 대학과 1980년대 한국의 대학에서 대학의 이데아를 봤을 수도 있다. 그때의 대학에는 ‘금지를 금지하라’라는 혁명적 언어, ‘대동세상’이라는 이상향의 언어들이 분출하면서 정치의 본질을 일깨워왔다. 대학은 정치가 자신의 본성으로서 유토피아를 꿈꾸려 하지 않을 때, 정치가 권력과 개별적 이해관계의 게임에 빠져들려고 할 때, 정치를 각성시켰고 정치에 상징의 언어들을 공급하려 했다. 그러므로 대학은 정치와의 불화를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학은 자신의 본래 임무를 벗어 던져버렸다. 대학은 더 이상 제도권 정치에 맞서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대학은 권력과 자본과의 결탁을 통해 기성 질서에 편입되려는 노력에 매진하고 있다. 대학은 살아남아야, 더 큰 경쟁력을 가지고 살아남아야 하며, 더 많은 사업비와 연구비가 생존을 보장한다는 논리가 팽배해 있다. 그러기에 대학에는 기능주의적 언어들, 실증주의적 언어들이 춤추고 있다. 질서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안정적으로 체제의 일부가 되려는 목표의 전략적 언어들만이 살아남아 있다. 유토피아 혹은 헤테로토피아를 꿈꾸는 언어들은 무용하거나 적대적이다. 따라서 퇴출되어야 할 운명이다. 산학협력단이란 이름이야말로 대학의 변질을 보여주는 표상적 언어가 아닐 수 없다. 

대학에서 인문학과 인문대학이 교육 편제의 수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의미심장하다. 인문학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상상력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공동체를 직조할 언어들을 만들고 전파하는 매트릭스가 인문대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요즘 유행하는 인문콘텐츠학으로, 인문대학을 인문콘텐츠대학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인문학과 인문콘텐츠학은 결코 같지 않다. 인문콘텐츠학은 자본이 매력을 느끼는 지적 상품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치를 일깨울 어떠한 언어적 잠재력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문학과 인문대학 만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데 필요한 목적합리적 언어들에 포위되어 있고, 학생들 또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스펙의 언어들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이다. 

대학은 특별한 장소다. 사회적 특권을 가진 장소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상상력을 일굼으로써 사회와 공동체를 끝없이 진보시키려는 혁명적 장소라는 의미에서다. 대학이 그 특별함을 상실한 자리에는 현실과 질서에 안주하려는 집단 욕망의 전체주의가 확산하게 될 것이다. 


하상복 목포대학교·정치철학

서강대, 브뤼셀자유대학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9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목포대학교 정치언론홍보학과에 재직 중이며 문화, 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연구 저서로는 『권력의 탄생』, 『이미지, 상징·재현·운동의 얼굴』,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읽기』, 『죽은 자의 정치학 ―프랑스·미국·한국 국립묘지의 탄생과 진화』, 『광화문과 정치권력』, 『빵떼옹 ─성당에서 프랑스 공화국 묘지로, 혁명과 반동의 상징정치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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