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곱씹게 하는 소설 - 김금희 작 ‘경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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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곱씹게 하는 소설 - 김금희 작 ‘경애의 마음’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0.07.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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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소설을 왜 읽는 것일까? 극히 한정된 역할을 맡으며 딱 한 번밖에 세상을 살지 못하는 우리가 더 많은 시간과 공간, 역할과 사고를 경험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 왔다.

‘경애의 마음’ 역시 등장인물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게 해준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간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 뉴스에서 종종 접하는 일들이 곳곳에 구체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경애는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을 늘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1999년 10월, 인천 인현동 상가건물에서 난 불로 56명이 사망하고 78명이 부상한 대참사였다. 학교 축제를 끝내고 호프집을 찾았던 고교생 다수가 희생되었는데 비상구가 불법 개조된 데다가 돈 내고 나가라며 사장이 출입구를 막은 탓에 안타깝게도 대부분 질식사했다. 경애는 영화 동호회 친구와 그 호프집에 있다가 공중전화를 걸기 위해 잠깐 밖으로 나갔고 덕분에 화를 면했지만, 친구는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또 다른 주인공 상수는 노총각이지만 온라인에서는 연애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주는 ‘언니는 죄가 없다’ 사이트 운영자 ‘언니’로 변신한다. 실전 경험은 없지만, 연애소설과 영화를 워낙 열심히 감상한 덕분에 뭉클한 조언과 사이다 해법이 얼마든지 나온다. 그렇게 여러 해를 보낸 후 해킹 사건이 터지면서 운영자의 실체를 공개해야 하는 난관에 처하고 만다.

상수와 경애는 미싱 회사에 다닌다. 회사를 물려받은 젊은 사장은 갑질을 하고 경애는 정리해고 사태를 맞아 노동쟁의를 벌인 후 한직으로 쫓겨나 혼자 창고를 지키게 되는가 하면 회사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도 벌인다. 회사 부서들은 미싱 수출 건을 성사시키기 위해 내부 경쟁을 벌여 실적을 빼앗는다. 상수와 경애가 파견된 해외 지사는 자사 제품뿐 아니라 경쟁업체 제품까지도 판매하며 수수료 챙기기에 바쁘다.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애 상담 사이트에서, 기업의 판매 부서에서, 베트남 지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세상과 삶을 가르쳐주는 일종의 교과서가 된다.

오랜 연인에게 버림받은 경애는 힘들게 마음을 추스르지만, 기혼남이 된 연인이 다시 찾아오는 상황을 맞는다. 국회의원 출신의 고압적인 아버지, 해외에서 외로이 죽은 어머니, 폭력을 휘두르는 형, 의붓아들 형제가 어떤 사고를 쳐도 전화 한 통으로 우아하게 해결하는 새어머니로부터 상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이러한 경애와 상수는 표면적으로는 직장 동료지만 어린 시절에는 호프집에서 죽은 학생과 각자 절친한 사이였고 연애상담 사이트에서는 고민을 털어놓는 동생과 조언하는 언니 관계가 되기도 한다. 결국 상수는 경애를 경애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는 인생의 짝이 되리라는 암시와 함께 소설은 끝이 난다.

▲ 저자 김금희
▲ 저자 김금희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유독 상처투성이다. 여기저기 쓰라린 삶을 바라보기란 편한 일이 못 되고 그리하여 이 소설 읽기는 유쾌하지 않다. 그나마 내 삶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이 들 수도 있고 어차피 누구든 오십보백보 고난을 헤치고 사는구나 하는 서글픈 깨달음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의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불이 나기는 했지만 가게를 가득 메운 학생 손님들이 아무도 술값을 안 내고 대피할 것이 걱정스럽다면? 현실의 나와 판이한 인물로 살았던 온라인 세상에서 내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면? 나를 버리고 결혼한 연인이 다시 찾아와 내게 위로를 구한다면? 지사의 비리를 내부 고발한 후 어이없게도 내가 해고당한다면? 아버지의 영향력 덕분에 실적과 무관히 회사에 붙어 있으면서 뒤로는 손가락질을 당해야 한다면?

호기롭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없다. 그저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는 인생에 대해, 그 인생 굽이마다 나름의 해법을 찾아야 하는 인간에 대해 곱씹어 생각하게 될 뿐이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 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8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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