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과 객체 | 그레이엄 하먼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368쪽

현재 객체지향 존재론(이하 ‘OOO’)은 20세기 후반 사상계와 문화계를 지배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륙철학에 등장한 ‘포스트휴머니즘’적 철학 운동에서, 주목할 만한 하나의 사조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륙철학의 일반적인 시류에 맞서서 인간의 사유 및 맥락과 독립적인 객체(존재자)의 실재성을 단언하는 비관계주의적인 실재론적 OOO는 객체의 온전한 자율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미학을 제일철학으로 표방한다.
이런 까닭에 OOO는 사실상 예술의 자율성과 미적 경험의 회복을 희구하는 철학 외부의 예술 분야에서 열렬히 수용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건축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또 열심히 수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객체지향 존재론(OOO)의 창시자 그레이엄 하먼의 이 책은 건축과 철학 사이의 대화를 심화함으로써 동시대 건축의 언어와 실천에 미치는 OOO의 영향에 대한 새로운 로드맵을 제공하는 동시에 형태와 기능 사이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구상을 제시한다.
하먼은 건축 분야에 가장 깊은 자국을 남긴 관념들을 구상한 세 명의 철학자, 즉 하이데거,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면서 건축에 대한 그들 사유의 한계를 부각한다. 그리하여 하먼은 건축이 OOO를 사용함으로써 형태와 기능에 관한 전통적인 관념들을 재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먼은 임마누엘 칸트가 건축을 ‘불순한’ 것으로 일축한 견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론과 탈관계화된 판본의 형태와 기능(제로-형태와 제로-기능)을 제시한다.
하먼은 피터 아이젠만의 작품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렘 콜하스, 프랭크 게리 그리고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들을 새롭게 평가함으로써 『건축과 객체』는 건축에 대한 대담한 시각을 제시한다. 기능의 ‘제로화’라는 어려운 과업을 완수함으로써 건축은 미학적으로 고갈된 전형적인 양식들을 다시 활성화하는 최전선에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결론짓는다.
하먼은 철학자로서 자신이 『건축과 객체』라는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건축이 인간 실존이 이루어지게 하는 주요한 매체”이고 “건축이 ‘제일철학으로서의 미학’이라는 OOO 원리와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명시적으로 표명한다. 인간 실존이 철학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간에게 주요한 현실감각을 제공하”는 건축은 철학의 엄연한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또한, 하먼은 건축을 공학으로도 환원되지 않고 조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 “미학적 명령도 받으면서 작업하는 실천 활동”으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먼은 건축을 ‘제일철학으로서의 미학’ 테제를 내세우는 OOO 철학이 전개될 수 있는 안성맞춤의 대상으로 여긴다. 더욱이 하먼은 건축이 “실재의 본성에 관한 암묵적 언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건축과 철학 사이의 대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로부터 철학은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먼의 객체지향 미학에 따르면 무언가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미적 경험’을 유발할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객체와 그 성질들 사이에 긴장이, 즉 반직서주의적 상황이 구축되어야 한다. 하먼에 따르면, 직서주의란 “우리가 어떤 주어진 존재자도 적절한 일단의 성질을 나열함으로써 제대로 서술할 수 있다”라는 관념이다. 예를 들면 “객체는 성질들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생각이 직서주의의 사례이다.
직서주의적 상황이 구축되면 객체가 성질들로 환언됨으로써 객체와 성질 사이의 균열이 사라진다. 이는 미적 경험이 유발될 수 없는 ‘지식’을 생산하는 것일 뿐이며, 그럴 때 철학과 예술은 직서적 객체만을 생산하는 과학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직서주의는 철학과 예술의 적이며,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서의 건축의 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학을 극구 부정하는 건축, 직서주의적 건축은 단지 공학이 되거나 어떤 다른 분과학문이 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먼의 객체지향 미학은 우리가 예술을 경험할 때 “감상자와 작품이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자율적인 혼성 객체를 구성한다는 ‘기이한’ 형식주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미적 경험을 생산할 채비를 갖춘 존재자인 작품과 그것을 대면하여 미적 경험을 겪는 감상자로 구성된 관계로서의 독립된 객체, 즉 그 밖의 맥락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객체가 된다. 건축의 경우에, 이 책에서 하먼은 그것을 ‘건축적 세포’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인간 없는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없는 건축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객체지향 건축 미학은 반직서주의라는 날실과 형식주의라는 씨실로 직조된다.
이 책에서 하먼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기능주의 건축의 준칙을 환기시키면서 ‘형태’(form)와 ‘기능’(function)을 건축의 핵심적인 이원성으로 설정한다. 하먼은 ‘형태’를 단순한 “시각적 외관”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관여하는 모든 관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물의 실재”로 규정하고, ‘기능’을 “사물의 협소하게 실제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사물이 맺은 관계라면 무엇이든” 가리킨다고 규정한다. 하먼은, 건축이 기능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자율적인 객체이자 독자적인 예술 장르로서의 객체지향 건축으로 현존하기 위해서는 형태와 기능을 ‘제로화’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형태와 기능을 탈맥락화하여 비관계적인 것들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탈맥락화된 비관계적 형태와 기능은 각각 ‘제로-형태’와 ‘제로-기능’으로 일컬어진다. 요컨대 객체지향 건축은 ‘제로-형태’와 ‘제로-기능’을 달성함으로써 구현된다.
이 책에서 하먼은 건축물의 자율적인 비관계적 형태, 즉 ‘제로-형태’를 발견하려면 “건축물과 마주치는 모든 특정한 방식과 독립적인 건축물의 심층 구조를 찾아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형태의 ‘제로화’는 비직서주의적으로 또는 심미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서, 객체지향 건축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유지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먼은 탈관계화된 자율적인 종류의 기능, 즉 ‘제로-기능’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의 관건은 “모든 특정한 기능과 분리된 어떤 추상적인 종류를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견지에서 기능의 제로화 기법으로 여겨질 수 있는 ‘기념물적 건축’의 두 가지 실례, 즉 알도 로시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례와 콜하스의 설계가 검토된다. 여기서 ‘제로화’는 ‘탈관계화’를 뜻하는 것이지, ‘무화’를 뜻하지는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예컨대, 건축에서 기능의 무화는 불가피하게도 건축을 시각 예술의 한 장르인 조각으로 환원시키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객체지향 건축 이론에 따르면, “건축의 명예를 지키는 올바른 방법은 기능을 형태화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형태와 구분되는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철학자로서 하먼은 “다양한 제로화 기법은 건축가들 자신에 의해 발굴되어야 하고 추구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