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론에 기초한 대등론으로 완성된 동아시아문명론의 결정판

[신간소개]

2020-03-22     김한나 기자

■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68쪽
 

국문학자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어갈 해법의 실마리를 제시한 책이다. 동아시아문명권의 옛 글과 구비철학에 흩어져 있던 대등론의 유산을 화합의 새 담론으로 펼친다. 동아시아 문사철 전통의 화수분을 깊이 천착해 온 저자는 '무명론'이라는 전대미문의 기획으로 동아시아문명론의 신기원을 이룬다. 먼저 저자는 차등론, 평등론, 대등론의 정의와 관계를 논한다. 유럽문명권이 주도한 평등론은 차등론을 부정하는 대전환을 이룩했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거나 이상론에 머무르기 쉽다는 결론이 났다.
 
저자는 이규보, 최한기 등의 글과 유성룡의 형 이야기 등 구비철학을 들어 유식이 무식, 무식이 유식이며, 미천이 존귀, 존귀가 미천인 대등론을 설파한다. 대등론의 기초를 이루는 생극론은 안도 쇼에키에게서 보듯, 동아시아문명의 철학적 공유재산이며, 동아시아 공동체 사이의 알력 해결과 평등론의 근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시대 창출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 대등론은 말미에서 유명이 무명, 무명이 유명인 무명론으로 변주된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는 예술인 앞소리꾼의 상여소리는 낮아야, 이름이 없어야 포용할 수 있다는 저자의 뜻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일본과 화합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잘 알아야 한다며 그 본보기로 한일 미술문화론을 전개한다. 동아시아 산중시 본령의 근대 변용, 유·불·도가의 사유 비교(『동아시아문명론』, 2010)라는 묵직한 주제가 아닌 예술론, 미술문화론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특히 이케노 타이가의 작품들을 들어 관념산수화에서 진경산수화로의 혁신이 동아시아철학의 변천과도 맞물린다는 지적은, 동아시아 문사철의 전통을 꿰뚫고 있는 거장의 안목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산수이화에서 산수기화, 이원론에서 일원론 그림이라는 사고의 확장은 세계미술사, 철학사, 문학사가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여행기와 논설, 미술 감상의 혼효는 새로운 글쓰기의 대안으로 제시한 옛 글 기언(『창조하는 학문의 길』, 2019)의 다른 예시라고 하겠다.

또 저자는 교토, 항주는 물론, 류쿠, 운남을 찾아가 알려지지 않은 유산까지 아우르며 다시 알린다. 요 출신 야율초재의 공생이나 남조의 덕화비는 중국의 대국 모색에 시사하는 바가 크고, 류쿠의 만국진량종은 동아시아문명의 교량을 자처하는 대심의 발로이며, 월남사상사는 남북 철학사 설계의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동아시아문명의 발전은, 삼국만이 아니라 예부터 그 일원이었으면서 배제되어 온 약자들의 목소리까지 존중하는 데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아시아문명론에 대한 논의는 20세기말 아시아적 가치가 회자되면서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후 주로 유교 전통에 주목해 왔다. 중국의 뚜웨이밍 교수가 동아시아의 유학 인문주의가 생태적 전환을 모색함으로써 세계문명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문명들의 대화』), 다소 추상적이며, 윤리적 측면에 치우쳐 있다. 삼국의 놀이와 문화로 풀이한 문명론(『이어령의 가위바위보』)은 흥미롭지만 철학적 원형은 찾기 힘들었다. 유가(정명론)에서 탈피해 동아시아 전통 속 무명유명론의 사유를 대등론(생극론)으로 심화시킨 이 책은 독보적이면서도 유연한 문명론의 개시를 알린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대등론에 기반한 화합을 동아시아 충돌을 해결할 핵심 사상으로 제시한다. 한국, 중국, 일본이 대등한 관계에서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공유할 유산을 찾아 상생의 근거로 삼는 운동이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