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련의 역사를 통해 모색하는 ‘정당정치’의 본령

2023-05-20     이현건 기자

■ 독일현대정치사: 아데나워에서 메르켈까지, 기민련을 통해 본 정당국가 독일 | 문수현 지음 | 역사비평사 | 456쪽

 

정치가가 일반인보다 나은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며, 정당이 다른 사회 기구보다 더 도덕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이거나 합리적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그러나 정당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생각하고 행동”할 의무가 있으며, “시민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정당의 본령이다. 이처럼 정당 본연의 과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함으로써만,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정치 역시 다른 모든 인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역사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정당의 역사는 선거를 둘러싼 한판 승부의 역사로서 ‘산화’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의미에서건 부정적 의미에서건, 여러 정치적 실험들의 보고로서 저장되고 비축되어야 한다. 정치가 역사성을 가지며 역사에 기록된다는 사실을 사회 전체가 매 순간 기억할 수 있다면, 선거권자도 피선거권자도 좀 더 의연하게 정치를 하고 또 그 정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독일 기민련의 역사를 통해 ‘정당정치’의 본령을 모색하고 있다. 기민련은 1949년 2차대전 이후 패전국 독일에서 치러진 최초의 선거 이래 2021년 선거까지 70년간 20번 치러진 연방의회 선거 가운데 단 4번(1972년, 1998년, 2002년, 2021년)을 제외한 16번의 선거에서 집권 여부와 무관하게 제1당이었다. 서방통합을 넘어선 유럽통합, 사회적 시장경제, 독일통일 등 독일 현대사의 굵직한 틀이 기민련 집권 시기에 만들어졌다.

흔히 ‘서구’로 통칭되기는 하지만, 독일의 자본주의는 영미권과 현저히 다르다. 기실 영미식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독일에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산업화의 후발주자로서 독일의 산업화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을 통해 시작되었다. 기민련의 대표적인 정치가인 쿠어트 비덴코프는 “독일에는 기업이 돈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인간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하나의 기업은 하나의 사회적 결사체라는 관념이 있다”는 말로 독일식 ‘라인 자본주의’의 본질을 설명했다. 이는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개념을 통해 기민련 초기부터 최근까지 당의 노선으로 관철되어왔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현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공동결정권’이라는 독일 특유의 제도가 기민련의 반대가 아닌 협조를 통해 제도화되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공동결정권에 대한 논의는 19세기에 사민당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석탄 철강 분야로 제한된 공동결정권이 최초로 제도화된 것은 아데나워 집권기인 1951년이었다. 그리고 이 공동결정권은 이후 기민련의 주요 정치 강령들에 모두 포함되었다. 사용자 측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동결정권의 범위를 전 산업 분야 대기업으로 확대시킨 공동결정법이 1976년 최초로 제정될 수 있었던 것도 기민련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처럼 기민련은 시장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영미식 자유방임 시장자유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사민당이 아니라 기민련의 브랜드로 시작하여 독일인들의 DNA로 뿌리내렸다.

사회적 시장경제와 더불어 반공주의는 기민련의 주요한 정치적 지향이었다. 전쟁 직후 아데나워의 정치적 승리는 냉전 체제 강화 과정 없이는 설명할 수 없으며, 통일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동안 사회주의에 대한 국민적 우려는 기민련의 주요한 지지 기반이 되었다. 68혁명을 경험하면서 기민련 개혁의 요구가 고조되었던 1976년에조차 기민련의 선거 슬로건은 당 개혁 세력이 주장한 ‘새로운 사회 문제’가 아니라 당내 보수 우파가 주장한 ‘사회주의 대신 자유’였다.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를 안보 위협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사민당을 고립시키는 전략은 기민련 선거전에서 오랫동안 상수로 기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공주의를 간단히 동독에 대한 적대와 등치시킬 수는 없다. 1970년대 초 동방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던 당시 기민련 다수는 서독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독일 국가이기 때문에 동독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1972년 선거를 통해 동방 정책에 대한 국민적인 지지가 분명해지자 이를 현실로 인정하고 콜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사민당이 시작한 동방 정책의 근간을 유지해갔다.

동방 정책을 기민련 당사와 결부시킬 때 중요한 것은 동방 정책이 도입되기 이전에도, 도입될 당시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기민련을 거슬러서가 아니라 기민련과 더불어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동방 정책은 사민당만큼이나 기민련의 정책이기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이 바뀜으로써 누적된 경험과 지혜를 발휘할 길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처지에 비추어볼 때 충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대충 만들고 계속 수리해서 쓰는” 영국 정치와 달리 독일의 정치가들은 논의하고, 또 논의한다. 그중에서도 기민련은 특히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정당이다. 공동결정권은 20년 이상 논의된 끝에 제도화되었고, 당의 기본강령이 의결되기까지는 7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길고 지루한 논쟁을 거쳐 결정된 쟁점에서 후진은 더 어렵다. 일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느리고 일관되게 움직이는 기민련의 작동 방식은 개별 정치가들의 동선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데나워는 서방통합, 에어하르트는 사회적 시장경제, 바르첼은 동방 정책에 대한 유연한 태도, 헬무트 콜은 유럽통합과 독일통일, 쿠어트 비덴코프는 공동결정, 하이너 가이슬러는 새로운 사회 문제,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는 기민련 기본강령 등 기민련의 대표적인 정치가들은 각자의 정치적 브랜드를 갖고 일관되게 추진해 나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독일 정치의 느린 속도는 독일 정치가 ‘협상’을 중시한다는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연정이 필수인 정치 구조하에서 협상력은 독일 정치가들의 주요 덕목일 수밖에 없었다. ‘까다로운 협상 파트너를 다루는 부문의 마이스터’로 꼽히던 아데나워는 말할 나위도 없고, ‘걸어다니는 중재위원회’로 꼽히던 키징어, ‘통합가(Integrator)이자 중재자(Moderator)’ 바르첼, ‘탁월한 협상가’ 콜, ‘탁월한 청중’ 앙겔라 메르켈 등, 에어하르트를 제외한 모든 기민련의 당대표들이 당대의 협상 전문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