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석(語釋) 및 가락의 분석으로 옛사람들의 서정을 밝혀내다

2023-05-07     박재민 숙명여대·고전시가

■ 저자 에필로그_ 『해독과 해석』 (박재민 지음, 태학사, 936쪽, 2023.03)

 

본저는 장르적으로는 고대가요 · 향가 · 고려가요 · 시조 · 가사를 담았고, 방법론적으로는 어학적 · 음악적 · 문학적 분석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서지학적 · 민속학적 방법도 동원하였다. 필자의 생애는 고전 작품의 기슭을 헤매면서 흘러갔다. 그것은 고되었지만 즐거웠고, 미진했지만 과분한 것이었다. 

논문에 몰두하던 약 20년 간의 기간은 되돌아보면 인생의 여정과 함께 흘러갔던 듯하다. 사람을 만나듯이 작품을 만났고, 그들과 대화하듯이 작품에게 말을 건넸으며, 험지를 여행하듯 작품의 기슭을 헤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곳곳을 걷던 많은 좋은 학자들을 만났고 그것은 그 자체로 내 인생이 되었다. 그런데 가끔 그럴 때가 있다. 헤매긴 헤맸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헤매고 있는가, 난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는가를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자각이 문득 든 2022년 봄에 처음 편집을 시작하였고 1년을 소요한 2023년 봄에 완간되었다.   


향가와 고려가요에의 관심

필자의 주된 관심은 고려가요와 향가에 있다. 고려가요로 학계에 데뷔했고 향가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가장 중요한 시기마다 꼭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볼 때, 아마도 난 이 장르들을 가장 사랑했었나 보다. 

고려가요와 향가를 왜 사랑하냐고 누가 물을 때, 필자는 “그것은 신라인과 고려인의 서정 세계를 여는 門이기 때문”이라고 늘 대답한다. 현재 남아 전하는 25수의 향가와, 14수의 고려가요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1000년 전 이 땅을 살던 이들의 서정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인가? 역사서의 대화로써, 몇 편의 한시로써도 추론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서정은 가락이 있고 음가가 살아 있는 향가와 고려가요에 밀도 높게 묻어 있다. 

그래서 필자의 연구적 관심은 두 장르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어석과 가락’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어휘의 뜻을 모르고서는 문학의 서정을 논할 수 없고, 근저에 흐르는 가락을 모르고서는 실질적 향유 느낌과 장르의 史的 전개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석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를 적은 논문이 〈고등학교의 音借字 · 訓借字 교육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이 논문을 통하여 그간 짙게 깔려 있던 향가 해독의 안개를 걷어내고 향찰 어법의 명료한 골격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향찰 어법의 골격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향찰의 한 어절은 한자(진짜 한자) + 차자(가짜 한자)로 결합으로 되어 있다”가 된다. 

가락 연구의 효용을 제시한 논문이 〈정석가 발생 시기 재고〉이다. 이 논문을 통하여 고려가요의 가락 연구가 장르의 史的 전개를 논하는 학문적 도구로 긴요히 활용될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또 고려인들의 노랫가락은 현전 자료들을 통하여 다시 입체적으로 선율화될 수 있음도 보였다.    


시조와 가사로의 확장

고악보에 나타난 가락과 문헌에 수록된 어법의 흔적들은 이후 필자가 조선의 장르인 시조와 가사로 연구를 확장시키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회고된다. 고전 시가 분야의 난제 중 하나로 ‘시조의 발생 시기’가 있다. 장르 연원의 중요성에 詩歌 전공자의 열정이 더해져 이곳은 여전히 가장 뜨거운 논쟁처로 남아 있다. 필자는 악곡의 분석을 통해 이 테마에 뛰어들었다. 〈시조의 발생 시기에 대한 소고〉가 그것이다. 이 논문을 통하여 시조는 고려인의 향유물이 아니라 조선초 즉, 15세기 태생의 문인들에 의해 비로소 창작되고 향유된 장르임을 확인하였다. 

어법적 방법론을 통해서도 시조 영역의 난제 해결에 가담하였다. 〈한글박물관소장 청구영언의 필사 시기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한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구영언은 이전에 〈진본 청구영언〉으로 불리던 것으로 김천택이 직접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남아 있는 어법의 흔적은 이를 강하게 부정한다. 이 논문을 통해 어법의 흔적이 우리의 학적 혼란을 수습해 줄 가능성을 찾아 보고자 하였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한글박물관 소장 청구영언은 1728년의 작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늦은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 이후의 작품이다”가 된다.

미지의 기슭으로 떠날 때

우리의 고전시가가 문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접어든 지 100년을 넘어간다. 그간의 연구사가 구축한 고전 시가의 지형도는 후학이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얼마나 큰 편리와 든든함을 주었던가. 그러나 그 지형도 속에는 여전히 잘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기슭들이 있다. 본고는 그 미지의 기슭에 대한 관찰 기록이다. 우리 고전 시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 기슭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에 담긴 자료와 이론을 지도 삼아 배낭에 넣고 떠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향가의 해독 방식과 고악보의 해석 방식을 알고 만나는 향가와 고려가요의 기슭은 여행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박재민 숙명여대·고전시가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향가와 고려가요를 주 분야로 하여 시조와 가사 및 고전의 현장에 관련된 연구를 수행하며 주요 저술로 『석주 고려가요』, 『신라 향가 변증』, 『고려 향가 변증』, 『고전의 현장과 스토리』 등이 있다. 나손학술상(2010), 일연학술제 국무총리상(2010), 난정학술상(2018)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