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민 담화문의 무게

[조원형 칼럼]

2023-02-05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2023년 2월 5일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되었다. 지난 100일 동안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국가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정부의 대응 조처는 안타깝게도 매우 미흡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안타까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치한 분향소마저 철거하겠다면서 유가족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이처럼 무책임한 모습을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부터 간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필자는 지난해 12월 31일 학술지 <텍스트언어학>에 게재한 논문 “재난 관련 대국민 담화문의 텍스트 구조 및 화행 방식 대조 분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성수대교 붕괴 참사 관련 대국민 담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침몰 참사 관련 대국민 담화, 윤석열 현직 대통령의 이태원 압사 참사 관련 대국민 담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연방 총리의 2016년 뮌헨 총기 난사 참사 관련 대국민 담화를 대조 분석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가 확인한 바는, 바로 자기 자신이 사건 수습의 책임자로서 관계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메르켈 총리의 담화문과 달리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자신이 책임의 주체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사건의 책임을 국가와 국민들에게 돌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박근혜 대통령은 실무 책임자들을 비난하는 데 대국민 담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앞으로 정부가 일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만 짤막하게 하고 130단어 남짓에 불과한 대국민 담화를 서둘러 매듭지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대국민 담화문에서조차 이와 같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듯한 말을 하는데 과연 일선 공무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금 직접 나서서 유가족을 위로하고 사건 수습을 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서울시 등 관계 당국도 유가족과 시민들의 추모 행렬을 방해하지 말고 실무 차원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기 바란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조치 시행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지금 당장 실시해야 하는 그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이다.

글을 맺으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추모하며 유가족들께 진심으로 위로를 드린다.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서 이번 참사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기원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