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정치, 자유와 연대

2022-12-18     고현석 기자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31강_ 김환석 국민대 명예교수의 「생명정치, 자유와 연대」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네 번째 섹션 ‘생존의 자유와 지구적 위기’ 제31강 김환석 명예교수(국민대 사회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생명정치, 자유와 연대


김환석 교수는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개인 자유’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인간 해방’ 모두”를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한 지적 도구로서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와 ‘통치성(governmentality)’ 개념을 본격 소개한 데 이어,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생태 위기를 맞아서 푸코의 그 같은 논의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가정하는 서구 문명의 존재론과 윤리에 도전”하고자 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에서의 ‘생명정치’를 설명한다. 요컨대 신유물론이 “인류세의 맥락에서 주장하는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가 “인간들뿐만 아니라 비인간들도 행위자로 취급하는 탈인간중심적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근대주의에서는 서로 상충되는 가치들이라고 여겨왔던 ‘자유’와 ‘연대’가”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역설한다. 다시 말하여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의 ‘자유’는 “(인간 너머의) ‘연대’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되고, 그와 동시에 ‘연대’는 ‘자유’가 “공동 세계의 형성에 기여하도록 보장하는 기반”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1월 26일, 김환석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3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머리말

미셸 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개인과 사회가 구성되는 과정을 이해하고자 한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권력이 특정한 유형의 지식을 생산하고, 그러한 지식은 권력을 촉진하고 강화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권력과 지식은 분리된 실체들이 아니라 하나의 복합적 네트워크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서구 사회는 18세기 이후 이런 권력-지식 네트워크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이에 따라 개인과 사회(또는 자유와 연대)의 구성도 역사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푸코의 ‘생명정치’와 ‘통치성’ 이론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후기 철학은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개인 자유’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인간 해방’ 모두를 자신의 ‘생명정치’와 ‘통치성’ 개념을 통하여 비판하고 극복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가 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진정한 실재에 대한 진리를 통해 해방된다는 계몽주의 관념을 거부한 포스트구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인간이 권력-지식 네트워크에 의해 구성된 주체이지만, 어떻게 열려진 자기 변혁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와 더불어 연대를 통한 저항을 추구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푸코의 포스트구조주의는 근대주의(그 우파 버전인 자유주의와 좌파 버전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기여하였지만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을 21세기에 새로이 대두한 신유물론으로부터 받았다. 신유물론이 기존의 근대주의 사상뿐 아니라 푸코의 이론이 지녔던 인간중심주의를 이렇게 비판한 이유는 지구가 ‘인류세’라는 생태 위기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 바로 서구 문명의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때문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유물론에서는 인류세의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가정하는 서구 문명의 존재론과 윤리에 도전하고자 한다. 바로 그러한 노력의 일부로서 신유물론 학자들은 ‘생명정치’를 탈인간중심적으로 재해석을 하고 근대주의의 핵심 이념들인 ‘자유’와 ‘연대’ 역시 인류세의 맥락에서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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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류세와 신유물론의 대두

푸코가 1970년대 후반에 처음 제기했던 생명정치 이론은 오직 인간 세계에만 적용된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것이 탈인간중심주의로 확대된 것은 21세기에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신유물론이 이러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2000년부터 출현한 ‘인류세(Anthropocene)’ 개념이 그 계기가 되었다. 대기화학자인 파울 크뤼천과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가 명명한 이 개념은 인간 문명이 주요 지질학적 힘이 되어 지구를 변화시킨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로 우리가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인류세에는 인간들에게 지질학적 행위성이 부여되는데, 이런 행위성은 전에는 유성, 지각판, 화산 활동 등과 같은 자연적 행위자들에게만 부여되었던 능력이다. 즉 인간들이 지구 시스템과 그 대기권 및 생물권에 남긴 자국이 너무 커서 마치 ‘자연의 힘’이 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류세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행위성, 문화와 자연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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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자들에게 인류세의 상태는 양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인류세는 (일부)인간들이 자연환경에 행사하는 세계-형성적 힘의 증대를 나타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태 위기와 그에 대한 인간 반응의 결여는 인간 힘의 한계를 드러내고 지구에는 인간의 힘을 몇 배나 능가하는 많은 존재들이 거주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따라서 신유물론자에게 인류세의 생태 위기란 사회와 자연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현재의 방식에 대해 도전하고, 이러한 이분법들을 가로지르며 뒤엎는 의존성, 얽힘, 공명들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문제를 이렇게 재정립하는 것은 우리가 관여해야 할 정치의 범위를 변화시키고 확대한다. 기존의 정치와 기술적 해법 또는 심지어 자본주의의 철폐는 더 이상 인류세의 생태 위기를 끝내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세계 안의 우리 자신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이해, 즉 완전히 새로운 우주론이기 때문이다.

 

4. 신유물론에서 본 인류세의 ‘생명정치’

그러면 신유물론에서는 인류세의 ‘생명정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신유물론에서는 인류세의 생태 위기(예: 기후 위기, 생물 대멸종 등)가 근대 문명의 이원론과 이에 기초한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 생명들 사이의 위계적 이분법을 넘어 생명 일반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고자 한다. 특히 비인간 동물은 이러한 사유에서 중요한 관심 사항이 되는데, 그 이유는 동물들이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정치가 지닌 부정의와 폭력성을 드러내는 좋은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근대 문명에서 동물들이 처한 비참한 생활(예: 공장식 축산업)은 물론이고 그러한 동물의 삶이 종종 인수 공통 전염병으로 이어져 인간과 동물을 인류세의 지구에서 공동 운명체로 만드는 결과를 빚기 때문에, ‘인간 너머의(more-than-human)’ 생명정치를 모색하는 데 있어 인간-동물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동물 관계에 대한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를 다양한 신유물론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담은 책이 Asdal, Druglitrø & Hinchliffe가 2017년에 편집한 Humans, Animals and Biopolitics: The More-than-Human Condition이다. 여기서 이들은 푸코의 생명정치를 인간중심적 틀에 갇혀 있다고 비판을 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푸코 이론이 근대주의 비판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열어주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 보고 있다. 신유물론이 ‘생명정치’를 인간 너머의 정치를 이론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수정이 필요한데, 그것은 첫째로 생명정치가 인간들이나 그 인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명 물질들의 어셈블리지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둘째로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결코 단일한 것으로 가정하지 말고 이론적 및 경험적 구체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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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류세에서의 ‘자유’ 이념의 위기

푸코가 생명정치와 통치성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적 연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바는 근대주의 사상들을 관통하는 ‘자유’ 이념과 그 바탕이 되는 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존재가 허구라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권력-지식 네트워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서구 근대인의 주체성은 생명정치적 통치성이라는 권력-지식 네트워크에 의해 구성되는 산물이라고 그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적 접근은 자유의 유의미한 비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간주되어 온 가정들(주체에 대한 본질주의적 개념과 인간의 진보적 해방에 대한 목적론적 비전)을 부정한다. 이 때문에 푸코의 저작은 종종 자유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혔다. 많은 뛰어난 비판가들이 권력 관계의 편재성이라는 푸코의 명제와 모순에 빠지지 않고 그가 자유를 긍정할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에 응답하여 푸코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권력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모든 사회 영역에 걸쳐 권력 관계가 있다면 ... 그것은 자유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비판가들이 생각하는 권력이란 억압이고 따라서 해방이란 관념을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실재에 대한 진리를 통하여 권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이러한 근대적 ‘자유’의 관념과 결별한다. 대신에 그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저항의 긍정적 수단이란 면에서 자유의 새로운 개념을 모색한다. 푸코에 의하면 모든 주체화의 권력은 그것이 억압적일 경우에조차 주체들에게 행위자가 될 수 있는 일부 역량을 부여하기 때문에 저항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렇지만, 또는 그 결과로, 이 저항은 결코 권력과의 관계에서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푸코에게 자유는 어떤 본질적 자율성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복종을 거부하는 것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오늘날 서구에서 저항(즉 자유)의 목표는 생명정치적 통치성의 주체화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 . . .

 

이렇게 푸코는 비판가들의 지적을 벗어나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과 부합하는 새로운 ‘자유’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대주의의 자유 개념이 지닌 주체 중심 사고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자유’ 개념 자체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제시하거나 큰 현실적 영향을 미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의 ‘자유’ 개념은 아직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신유물론 관점에서 볼 경우 여전히 개인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개념화를 탈피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비판적 지적을 할 수 있다. 근대 문명이 초래한 인류세의 불안정한 지구 환경에서, 푸코의 ‘자유’ 개념이 과연 근대주의를 근본적으로 넘어선 것이며 오늘날 세계의 현실에 적실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최근에 신유물론 학자들은 인류세의 생태 위기로 인해 ‘자유’의 이념 자체가 근본적 위기에 당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의 사회 질서에 대한 정당화가 ‘자유’의 이념에 기초하는 것으로 사회 이론에서 이해되어왔지만, 인류세로 인해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 인류세에는 그동안 근대 사회를 정당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념이었던 ‘자유’를 폐기해야 하는가? 인류세의 생태 위기가 파국으로 달려가는 것을 막으려면 어떤 가치와 이념을 우리는 추구해야 하는가? 신유물론 학자들이 단지 비관적 미래를 예언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그들은 근대주의의 ‘자유’ 이념을 대신하여 인류세의 위기를 해결할 근본적 대안은 과연 있는가?

 

6. ‘인간 너머의 연대’를 향하여

인류세의 생태 위기는 푸코가 말한 인간중심적 생명정치가 지닌 이론적 문제점을 신유물론이 제기하게 만들었고 그 대신에 탈인간중심적인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를 모색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상이한 행위자들 사이의 역동적 관계로 본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는 인류세로 인해 근대주의의 지배적 이념인 ‘자유’가 정당성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과 따라서 이제는 그 이념을 폐기해야 하는가 여부의 문제를 신유물론이 제기하고 있음을 보았다. 비인간을 행위자로 취급하는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와 근대주의적 ‘자유’ 이념의 폐기 여부는 얼핏 서로 관련이 없는 두 가지 문제들처럼 보이지만, 신유물론이 이들을 연결지어 고찰함으로써 인류세의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푸코의 이론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생명정치적 통치성의 일방적 지배에 반대하는 주체의 저항이 바로 ‘자유’라고 푸코는 강조한 바 있다. 신유물론에서 주장하듯이 인류세에는 우리가 비인간들의 행위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푸코가 주장한 “저항으로서의 자유” 개념을 우리는 비인간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동물운동의 실천에서 큰 함의를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동물 복지 캠페인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다섯 가지 자유”라고 알려져 있다. 첫째는 배고픔과 갈증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고통ㆍ상처 및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넷째는 정상적인 행동을 할 자유, 다섯째는 공포와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이다. 이 “다섯 가지 자유”는 동물 운동이 대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지 인간 활동가들이 주체가 되어 요구하는 가공적 관념이 아니라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비인간 동물들이 인간의 폭력적 지배에 희생당하고 저항해온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동물들이 단지 수동적 객체로서 순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자로서 끊임없이 저항을 해왔기 때문에 인간 대변자를 통해 요구될 수 있었던 ‘자유’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비인간 동물들에게 ‘자유’는 폐기되어야 할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지배해오고 또 인류세의 생태 위기를 촉진했던 생명정치적 통치성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이념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인류세에 근대주의의 ‘자유’ 이념이 위기에 처한 이유는 그것이 오직 인간들에게만 허용되는 인간중심적 개념이었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생태 위기를 초래하는 개념이기 때문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유’는 인류세에 폐기되어야 할 이념이 아니라 비인간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할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에는 비인간 생명들의 자유가 그 통합적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위 동물운동의 예에서 얻을 수 있는 함의는, 이러한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가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전개되려면 비인간 생명들의 목소리와 행위성을 대변할 수 있는 인간 대변자들과의 ‘연대’, 즉 인간 종과 비인간 종 사이의 종간 연대를 의미하는 ‘인간 너머의 연대(more-than-human solidarity)’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최근에 호주의 신유물론 학자 페트라 차커트(Tschakert)는 기후 위기가 요구하는 종간 정의의 원칙과 실천을 뒷받침하는 기초로서 ‘인간 너머의 연대’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한 바 있다. 그녀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시공간에 걸친 공감적 경험들을 가능하게 하는 네 가지 조우들(시각적 조우, 체현적 조우, 윤리적 조우, 정치적 조우)을 제시하면서, 이들이 ‘인간 너머의 연대’의 성격이 무엇이며 오늘날의 위기에서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데 어떤 윤리와 정치가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시각적 조우(visual encounter)는 ‘인간 너머의 연대’를 위한 1단계 실천으로서, 우리가 아는 타자를 넘어서 먼 타자를 우리가 보고 인지하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하는 조우이다. 그 가장 전형적인 예는 기후 난민과 북극곰일 것이다. 시각적 조우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 너머의 연대를 달성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타자들과의 가능한 관계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을 제공하고 의미 있는 연대에 대한 진정한 영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체현적 조우(embodied encounter)는 2단계의 보다 깊은 실천으로서, 타자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그들의 정체성, 경험, 취약성, 그리고 고통을 파악하는 조우이다. 그 가장 좋은 예는 2019년 호주 산불에서 죽거나 화상을 당한 코알라, 캥거루, 조류, 박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체현적 공감을 자아내고 인간 너머의 고통을 공유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조우는 기후 위기에서의 공감의 관계적 존재론이 어떻게 돌봄의 실천으로 번역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된다. 

셋째로 윤리적 조우(ethical encounter)는 체현적 조우에서의 공감이 확립되고 난 후에 추가되는 도덕적 책임으로서 인간 너머의 연대를 위한 3단계의 실천이다. 점진적인 기후 변화와 극단적 날씨로 인해 이미 해를 입은 우리가 얼굴을 모르는 수백만의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광범위한 배제와 폭력 그리고 망각은 기후 정의가 재현하고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부정의의 영역이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경우에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토착민과 유색 인종들, 비인간의 경우는 꿀벌과 해양의 산호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넷째로 정치적 조우(political encounter)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타자를 포함한 수많은 존재들(비척추동물, 세균, 바위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가장 복잡한 4단계의 실천이다. 인간 너머의 진정한 연대를 위해서는 우리의 관계망에서 가장 멀고 다른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관여가 필요한 것이다. 스탕게르스와 라투르가 제시한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 개념은 인간과 비인간의 모든 행위자들 사이의 지속적인 정치적 협상을 통해 “공동 세계의 점진적 구성”을 목표로 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 너머의 연대를 위한 정치적 조우의 실천은 이런 ‘코스모폴리틱스’를 통해 모든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이 글의 주장을 요약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신유물론이 인류세의 맥락에서 주장하는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비인간들도 행위자로 취급하는 탈인간중심적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근대주의에서는 서로 상충되는 가치들이라고 여겨왔던 ‘자유’와 ‘연대’가 결코 상충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의 ‘자유’는 (인간 너머의) ‘연대’를 위한 전제 조건이고, 또 후자는 전자가 공동 세계의 형성에 기여하도록 보장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에서 ‘자유’와 ‘연대’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호 의존적 가치이자 이념들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유물론이 제시하는 근본적 대안은 바로 이러한 인간 너머의 생명정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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