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녀교육

[류근조 칼럼]

2020-03-01     류근조 논설고문/중앙대학교 명예교수·시인

무자녀가 아니라면 혹 모르지만, 자녀교육의 경우 누구에게나 중요한 공통관심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필자 개인적인 경우 네 자녀의 가장(家長)으로서 현재까지도 자식들의 교육문제에 대하여 특별한 철학은 고사하고 다른 부모들에 비해 뭐 별다른 평균 수준의 노력도 못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라고나 할까.

물론 필자의 가정에도 이를테면 자주(自主), 자발(自發), 자립(自立)의 가훈(家訓)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런 목표 덕목들을 얼마나 실천했으며 또 실효를 거두고 있는지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준거도 마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반백이 다 되어 문득 눈을 가정으로 돌려 자식들을 보니 어느덧 자식들은 속수무책으로 제 길로 자라서 자기들 나름의 길을 가고 있었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대견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그간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지난날이 자괴스럽다는 생각이 앞설 뿐이다.

이를테면 영화 “SOUND OF MUSIC”에 나오는 해군 명문가 아버지 T 대령처럼 일관된 엄격한 규범이라든가 실천철학으로써 자녀들을 대하고 가장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굳이 이 주제와 관련시켜 말한다면 누군가는 지나친 겸손의 오만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조심스러운 생각이 문득 들긴 한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정성을 다하지 못한 부모일수록 늦게나마 자녀들의 장래에 대하여 관심과 기대는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의미에서 현시점에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필자가 부모로서 자식의 바람직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점은 학교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부모는 우선 자녀 스스로 자신이 지닌 소질과 가능성을 찾아 그것을 극대화함으로서 자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터 줘야 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그렇지 않고 요즈음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야기되고 있는 문제들처럼 과잉보호하기로 들면 도리어 자녀의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 그것도 정도가 있겠지만, 삶을 전장(戰場)터에 비유할 경우 적이 동남방 몇 km 지점에 나타났다는 정보는 제공하되 적을 생포하는 일은 자녀에게 맡겨야 한다는 이치와 같다는 의미를 강조해 두고 싶다.

모든 현실이 우리의 경우와 동일한 것은 아니니까 이 사례가 전부 좋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아주 오래전 신문에 소개된 바 있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이   민간 15세의 이수경 양이 수기형식으로 쓴 “한국 애들 정말 불쌍해”란 책의 내용을 보더라도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도 필수적이라고 생각은 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이나 학교 현장에서 다 같이 자발 학습이 가능할 수 있도록 교육여건을 조성해 주는 일이 중요하지 아니할까 하는 생각이다. 심성도야(心性陶冶)를 통한 인격 형성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한국 부모들의 경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경우처럼 자식이 소질에 맞아 좋아해서 가려고 하는 자식을 배려하지도 않고 자식의 장래를 순전히 자기 기준이나 사회 통념에 맞추려는 쪽이 더 지배적이기 때문에 도리어 자식의 장래를 망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또 학교 현장 역시 국가 민족의 장래나 국제관계 혹은 현실의 여건에 맞는 교육목표를 세워서 과연 이에 상응한 인재들을 키우고 공급하고 있는 쪽으로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곤 하나 가정에서의 튼튼한 자녀교육은 이 같은 국가적 교육   사업과 맞물려 동시에 추진돼야 할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아직도 직장에 나가는 자식이나 현재에도 여전히 장래 문제를 물색 중인 자식에 대하여 그 성장 가능성을 무한히 믿고 기대하고는 있지만, 부모라 해도 그 깊이와 폭을 정확히는 모르기 때문에 다만 자식들이 하는 일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같이 고민하고 가끔 의견을 얘기해 주고 있을 뿐 자녀교육에 무슨 왕도가 있다고 믿는 부모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소신껏 말해두고 싶다.

그러니까 필자로서는 자식들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서 부모들의 역할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   정하고 자신의 일은 자신이 주어진 여건에 맞게 계획하고 실현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바라고 있는 그런 편이라고나 해야 할까.

아니, 인생이란 유아기 부모의 품안을 벗어난 이후엔 수레처럼 앞에서 끌어주는 역할이 아닌, 앞에서 방향을 찾아가는 자식의 노력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따라가야 하는, 결국 자식 자신의 문제로서 스스로 그 해결의 주체 역시 자기 자신의 역동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시인 롱펠로우도 그의 시 <인생찬가>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이란 야영장에서 끌려가는 망아지가 되지 말고/투쟁하는 영웅이 되라”

내 자식들 역시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기를 바랄 뿐 부모라 하여 마냥 참견하며 그 이상 또 무슨 힘겹게 할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류근조 논설고문/중앙대학교 명예교수·시

중앙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시인이자 인문학자. 1966년 『문학춘추』 신인상으로 등단. 저서로 『날쌘 봄을 목격하다』, 『고운 눈썹은』 외 『지상의 시간』, 『황혼의 민낯』, 『겨울 대흥사』 등 여러 시집이 있다. 2006년 간행한 『류근조 문학전집』(Ⅰ~Ⅳ)은 시인과 학자로서 40여 년 동안 시 창작과 시론, 시인론을 일관성 있게 천착한 업적을 인정받아 하버드 대학교와 미시건 대학교의 소장 도서로 등록되기도 했다. 현재는 집필실 도심산방(都心山房)을 열어 글로벌 똘레랑스에 초점을 맞춰 시 창작과 통합적 관점에서의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