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곰삭힌 물음: 예술과 도덕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2022-10-30     윤영돈 인천대학교·윤리교육

■ 저자에게 듣는다_ 『미학적 윤리학과 도덕교육』 (윤영돈 지음, 교육과학사, 384쪽, 2022.09)

 

올해 3월, 존경하는 은사님(진교훈 서울대 명예교수)이 선종하셨다. 정년 이후 올 초까지 서울대 명예교수회관 1층 창가 한쪽에 칸막이로 둘러싸인 좁은 연구공간에서 20여 년간 교육과 연구와 사회봉사를 쉼 없이 실천하시는 모습을 자주 뵐 수 있었다. 은사님의 마지막 조교라서 그런지 어깨 너머로 교수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예술과 도덕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은 매우 오래되고 진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입학 면접시험에서 은사님으로부터 받았던 물음이기도 하다. 철학적 인간학 전공자로서 은사님은 ‘도덕교육은 무엇보다 인간학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인간에 대한 풍부한 이해는 무엇보다 문학가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지론을 종종 펼치셨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학과 도덕교육의 당위의 물음은 다소 폭력적이다. ‘폭력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위의 요구가 자칫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억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당위의 물음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인간학적 물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에 비로소 유의미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필자의 대학시절, 전공학과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는 교과목이 부족했다. 그래서 문학, 예술, 미학, 심리학 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타 학과 전공강좌나 교양강좌를 자주 기웃거렸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욕구와 욕망이 꿈틀거리는 감성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빛과 그림자, 의식과 무의식,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심연이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추악한 모습도 있지만 신성이 깃들기까지 한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작품과 미학은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된다. 


예술과 도덕의 관계 양상과 그 논의의 출발점  

학부 2학년 2학기에 수강했던 은사님의 <문화와 윤리>(1992.2학기) 강의시간에 M. 레이더 & B. 제섭의 『예술과 인간가치 Art and Human Values』 “9장 예술과 도덕”을 발제했다. 이를 계기로 미를 선으로 환원시키는 절대적 도덕주의로부터 선을 미로 환원시키는 절대적 심미주의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마음에 담게 되었다. 플라톤이 미를 선으로 환원시키는 입장이라면 니체는 선을 미로 환원시키는 입장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는 미와 선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도 연합하는 입장에 위치한다. 

플라톤은 예술과 도덕의 관계 양상의 출발점에 서있다. ‘학자는 모름지기 자신이 관심을 갖는 사상이 최초로 표현된 텍스트를 그 나라 언어로 공부해야한다.’는 은사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플라톤의 예술철학과 그리스어 공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학부 4학년 여름 계절학기에 서승원 선생님의 <예술과 철학>을 교양강좌로 수강하게 되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아테네에서 플라톤으로 박사학위(“플라톤의 폴리테이아, 파이데이아 그리고 테크네”, 1991)를 받은 분이셨다. 너무 늦은 나이에 귀국하셨기에 대학에서 전임 자리를 얻지 못했고, 그해 여름 강의를 끝으로 미국으로 떠나는 시점에서 마지막 강의를 수강한 셈이었다. 이 강의를 통해 필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3대 비극시인을 비롯한 아테네의 문학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었다. 

석사과정 3년간 그리스의 문학(특히 비극)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바탕으로 “플라톤의 교육론에서 예술과 도덕의 상호 보완성에 관한 연구”(1998.2)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해군사관학교에서 윤리학 교수요원(1년 시간강사, 2년 전임강사)으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전임강사 승진 자격요건으로 제출한 논문(“아리스토텔레스 교육론에서 예술과 도덕의 상관성 연구”, 『해사논문집』 제43집, 2000.12)을 통해 은사님으로부터 받은 물음과 관련한 답변에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어떻게 즐겁게 의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미학적 윤리학’과 그 핵심 내용인 ‘미적 도덕성(aesthetic morality)’을 논할 때, 미학과 윤리학, 미와 선(도덕성)은 독자성과 고유성을 지닌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와 예술과 미학은 선과 도덕과 윤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 자체로 고유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와 선, 예술과 도덕, 미학과 윤리학은 내면적 상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양자가 형식의 유사성에 의한 상징 관계로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칸트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미와 숭고는 도덕성의 상징이다.” 미적 도덕성은 무엇보다 미와 숭고가 도덕성과 상징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성립하는 개념이다. 

필자의 박사논문은 칸트의 미적 도덕성을 중심에 두되, 칸트와 긴밀하게 결부되는 도덕감 학파(샤프츠베리와 허치슨)와 쉴러를 연결하여 다뤘다(“칸트에 있어서 도덕교육과 미적 도덕성의 문제”, 서울대학교대학원, 2006.8). 칸트가 구상한 도덕형이상학으로서의 윤리학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과정에서 봉착하는 난관이 있다. 좋은 결과나 이익, 더 나아가 성공을 바라며 ‘가언명법을 따르던 내가 어떻게 나의 이해관심과 무관하게 정언명법을 따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가언명법으로부터 정언명법으로의 방향전환을 위해서는 점진적인 개선으로는 불가능하고, ‘거듭남’과 같은 ‘심성의 혁명’이 요구된다. 윤리학과 도덕교육에 미적 접근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사실 18세기 윤리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외견상 이타적인 행위까지 이기심의 발로로 설명하는 ‘홉스식의 이기주의 윤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미학의 주요 논의 대상인 ‘미와 숭고’는 자신의 이해관심과 무관한 심적 태도와 결부되어 있고,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감성계에서 예지계에 속한 ‘도덕성’의 이념을 해독할 수 있는 지원군과도 같다. 경향성과 의무의 갈등 구도에서 ‘투쟁으로서의 덕’ 개념이 부각되는 칸트 윤리학은 쉴러, 니체, 셀러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좁은 의미의 칸트 윤리학은 그의 미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즐겁게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견지에서 넓은 의미의 칸트 윤리학에는 그의 미학이 포함된다. 

한편 칸트 윤리학은 18세기 모더니즘의 절정에 위치하지만 그의 ‘숭고’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단초를 열어주기도 한다. 특히 ‘숭고’의 체험은 문학적인 어법으로 ‘원죄’라 불리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기꺼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강력한 계기가 된다.            
  

본서의 구성: 윤리학과 도덕교육에의 미적 접근

‘윤리학과 도덕교육에의 미적 접근’을 지향하는 본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부 미학과 윤리학의 내면적 상관성>에서는 전체 글의 서설에 해당하는 “미학과 윤리학의 만남”(1장), 예술과 도덕의 오래된 만남으로서 “동양의 예악사상”(2장)과 “서양의 선미사상”(3장)을 논의한다. 특히 서양의 선미사상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숭고의 맥락에서 재조명한다. 

<제2부 미학적 윤리학의 흐름>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1장), 샤프츠베리와 허치슨(2장), 칸트(3장)와 쉴러(4장)를 중심으로 미학적 윤리학의 흐름과 그 핵심개념인 미적 도덕성의 전개 양상을 다룬다. 더 나아가 인간은 의식의 차원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 또한 지니고 있기에 정신건강론의 측면에서 니체와 융의 미학적 윤리학(5장)도 논의한다. 

<제3부 도덕교육의 미학적 접근>에서는 캇시러의 문화철학에 근거한 신화와 예술의 인간학적 함의(1장), 음악적 메타포와 도덕교육(2장), 숭고의 미학과 내러티브 치료(3장), 환경윤리교육의 주요 접근법인 생태미학과 생태신학(4장)을 다룬다. 여기서 필자는 도덕교육의 장에서 미적 접근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가령, 자연을 중심으로 논의해 온 ‘숭고’의 문제를 ‘아파하는 인간(homo patiens)’이 겪는 삶의 맥락으로 확장하여 인문치료적 관점에서 다룬다. 그런가 하면 환경윤리교육의 실효성을 담보하고 생태적 감수성과 실천적 동기부여에 기여할 수 있는 생태미학 및 생태신학의 관점도 탐색하고 있다. 


향후 과제나 연구 계획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서는 “예술과 도덕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이 물음은 학부, 석사 및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지도교수이셨던 진교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화두였다. 이 물음을 견지하면서 공부한 지 30년이 훌쩍 지났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소속 대학의 연구년을 계기로 그간 공부했던 것을 재구성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은사님과의 만남이 필자의 연구 방향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필자의 저서와 은사님의 유고작(『자연법 연구』, 철학과현실사, 2022.9)이 같은 시기에 출간되었다. 운명 같은 사건은 아니지만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박사과정에 입학하던 해, 은사님은 『의학적 인간학』(서울대학교출판부, 2002)을 저술하셨는데, 이와 연장선상에서 필자는 정신건강(mental health)에 대한 철학 및 윤리학의 담론을 확장하여 도덕교육에 접목하는 주제로 단행본을 준비하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  


윤영돈 인천대학교·윤리교육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를 졸업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칸트에 있어서 도덕교육과 미적 도덕성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범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현 인천대학교 도서관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다문화시대 도덕교육의 프리즘과 스펙트럼』(학술원 우수도서), 『인성건강과 인문치료』(인천대학교출판부) 등이 있다. 미학, 종교철학, 인문치료 등을 도덕교육에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