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1267년에도 살아있었다!

2022-09-27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85)_ 백제는 1267년에도 살아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시비리라고 부르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바이칼 호수가 있다. 시베리아는 타타르어 시비르에서 왔으며 ‘잠자는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이칼은 ‘풍요로운 호수’라는 의미의 타타르어다. 예로부터 이 일대는 타타르, 한티, 네네츠, 에벤키, 브리야트, 투바, 야쿠트 등 수많은 유목민들의 거친 삶의 터전이었다. 

20여 년 전 여름, 나는 바이칼을 보기 위해 이르쿠츠크에 갔다. 이 도시에서 불과 68km의 거리에 바이칼이 있다. 오늘날 바이칼 동편의 초원지대는 부리야트 공화국의 땅이다. 수도는 ‘붉은 관문’이라는 뜻을 지닌 울란우데다. ‘붉은 혁명’의 영향으로 몽골의 수도는 ‘붉은 용사’라는 뜻의 울란바타르가 되었다. 나는 부리야드 울스(부리야드인의 나라)에 관심이 컸다. 부리야드Buryaad는 ‘부리족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인데 시베리아의 많은 토착민들은 부족이나 씨족명을 자연현상이나 동식물의 이름을 빌려 짓는다. Buriat; Buryaad는 buri(늑대)에 복수형 어미 –ad; at가 합쳐진 말이다. 

나는 이제서야 백제와 관련하여 바이칼과 부리야트족을 들여다 볼 생각을 하고 있다. 덧붙여 몽골 북단의 호수 흡수골과 바얀 고비(사막이라는 뜻의 몽골말)에 쓰인 ‘골’과 ‘바얀’이 미추홀, 백제와 어떤 유의미한 관계가 있을지 진지하게 살펴보려 한다. 

몽골 초원의 신흥 강자가 된 칭기즈칸의 몽골군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정복전쟁에서 무고한 일반인들을 너무나도 많이 죽였다.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 현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크라이나를 침탈해 수많은 죄 없는 주민들을 살상하고 죽음의 공포 속에 몰아넣은 러시아 통치자의 황당한 침략 사유는 상식적 삶을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 실소를 금치 못 하게 한다. 

권력욕에 불타는 정치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권력욕에 눈이 먼 통치자는 국민들의 반감을 외부로 돌린다. 고토 회복과 같은 애국심을 가장한 선동이 무력에 의한 침략의 그럴듯한 명분이 된다. 문제는 어처구니없게도 지도자를 자처하는 인물들의 이런 정치적 전술과 계략이 쉽게 통용된다는 데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이렇게 누군가는 사실과는 다른 억지 주장을 하고, 어떤 누군가는 궁금해야 할 일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우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후대의 다른 사서에 백제가 당대에도 여전히 존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중국의 정사 25史의 하나인 『원사元史』가 대표적이다. 너무나 명확해서 절대 거짓일 리 없어 보이는 그 기록을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눈에 들어온 이상 진위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

世祖(쿠빌라이 칸) 至元 4년(1267년) 정월, 백제가 그 나라의 신하 양호를 보내 조회하니 금수(錦繡)를 차별을 두어 하사했다(百濟遣其臣梁浩來朝, 賜以錦繡有差).

놀랍게도 백제 멸망 이후 6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다. 백제는 후한 때 이미 史書에 언급되기 시작한 이래 남북조 시대 남조의 진晉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매해 사신을 파견하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백제를 百濟 외에 백제伯濟, 백잔百殘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 명칭은 음차어로 보인다. 말뜻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백제의 건국주로 알려져 있는 온조와 비류 형제는 주몽의 친자인 유리가 나타났을 때, 왕권을 유리에게 넘기고 모친 소서노와 함께 남하하여 각자 새로운 국가 건설을 시도한다. 지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형제간 불화의 결과는 한성백제와 비류백제라는 두 도시국가의 탄생이다. 비류백제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을 정했다. 

지명에 쓰이는 忽은 ‘쿨, 골’로 발음되는 돌궐어로 ‘호수’를 뜻한다. 따라서 비류백제는 호수를 낀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고 보아야 한다. 미추홀이 오늘날의 인천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미추홀의 정확한 위치 비정이 백제사를 포함한 우리 고대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彌鄒忽을 고구려는 매소홀買召忽이라고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彌鄒와 買召가 유사한 음가를 지니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국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한국인으로서 원형의 재구성이 난제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들여다볼 뿐이다. 

위례성에 터를 잡고 시작한 백제 왕실은 원래 부여 왕 구태仇台의 후예로 부여夫餘를 성씨로 삼았다. 백제의 건국주 온조 형제가 해씨解氏인 주몽과 소서노의 소생이라면 당연히 성이 해씨였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온조와 비류는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졸본卒本 지역의 맹주 송양왕의 딸 소서노는 주몽을 만나기 전 이미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고 아들 둘을 낳은 과부였을 것으로 의심된다. 

만일 유리가 부친 주몽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朱蒙이라는 이름은 부여어로 ‘善射者’ 즉 名弓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다양한 이표기를 비교한 결과 사실은 ‘친구, 벗’을 의미하는 ‘동무’의 음차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부여족이라는 자신들의 족속에 대한 자부심 내지 충성도가 높았기에 부족명을 王姓으로 삼은 백제는 사비로 천도를 단행하고서도 여전히 국명을 南夫餘라 했다. 원적지라 할 북부여에서 쫓겨나 흘승골紇升骨에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 주몽도 졸본부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