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과 변방의 교섭, 중화와 오랑캐의 관계로 중국사를 새롭게 읽기!

2022-09-13     이현건 기자

■ 오랑캐의 역사: 만리장성 밖에서 보는 중국사 |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487쪽

 

이 책은 문명 간 대립과 영향, 대륙의 초원과 바닷길을 넘나드는 2000년의 역사 이야기로 중화제국과 오랑캐의 대립 및 교섭의 역사를 통해, 단일국가의 프레임으로 한정할 수 없는 중국과 변경의 역사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사를 다룬다. 나아가 중국 및 동ㆍ서양과 모두 교류한 이슬람세계의 역할, 근대 이후 서양의 흥기와 중국 침략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를 폭넓게 아우른다.

이 책은 ‘오랑캐의 역사’라는 주제를 통해 중국과 그 밖의 세계사를 서술한다. 중국문명권이 중원(중심)과 변경(변방)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 중원은 ‘화’華(중화, 화하)로, 변경은 ‘이’夷(오랑캐)로 불렸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중국사는 ‘화’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다. 저자는 제국 내부만 보아서는 “중화제국의 성격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원의 국가와 변경의 오랑캐들이 어떻게 교섭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중화문명권 또는 동아시아문명권의 형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문명권 차원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오랑캐의 역사’에 초점을 두었다.

중국인은 자기들이 사는 세상을 ‘세계의 중심’으로, 나머지는 모두 ‘오랑캐’로 인식했다. 이른바 화이론이다. 중국(中國)이라는 명칭도 중화사상에 근거한 것인데, 이 말에는 중국 한족이 중화문명을 면면히 계승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이 과연 과거의 중화제국을 계승한 것이며, 중국문명은 오랑캐문명을 배제한 순수한 중화문명으로 이루어졌을까? 화이론에 기반한 이분법적 인식이 여전히 중국사를 이해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문명사 차원에서의 중국사 이해를 가로막는다. 저자는 중국의 역사, 다시 말하자면 중국 영토 안팎에서 일어나고 스러진 민족들과 국가들의 역사는 유목사회(오랑캐)와 농경사회(중화제국)의 대립과 영향, 끊임없는 교섭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중국사는 한족 중심의 중화제국 역사로 협소하게 볼 수 없고, ‘중심’과 ‘변방’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고 확장되어온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화제국은 자신의 국가와 영토가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완전하다고 보았다. 중국은 스스로를 부족할 것이 없는 세계, 즉 ‘천하’로 인식했다. 이른바 ‘천하체제’다. 중화문명은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의 결과물인 데 비해, 오랑캐의 영토는 집약적 농경이 이루어지기 힘든 유목사회 또는 수렵과 채집, 농경이 공존하는 혼합형 사회였다. 동아시아의 오랑캐는 중원의 농경문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의존의 형태는 침략과 교섭, 영향 등으로 나타났다. 황량한 초원에 거주하는 유목회에서는 식량자원의 안정적 공급, 농경사회의 기술과 문화가 필요했다. 이들은 중원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중화제국에게 무력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소위 ‘내경전략’(inner frontier strategy)이다. 유목사회는 기동력 있는 조직과 함께 무력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오랑캐의 침략(외경전략 outer frontier strategy)은 사실 중원에 대한 의존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동아시아 오랑캐의 성쇠는 중원 국가의 성쇠와 반대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중원의 국가가 강력할 때 유목사회는 중화제국 안에 진입하는 내경전략을 취하고, 중원이 혼란스럽거나 힘이 약해졌을 때는 제국을 침략하는 외경전략을 취했다. 북위, 요, 금, 원, 청은 오랑캐 정복왕조로서 중국을 지배한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오랑캐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칭한다. 중원의 상황과 역학관계에 따라 오랑캐 국가의 노선과 흥망이 결정되었다. 요컨대 동아시아 오랑캐는 중화제국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천하체제’를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은 일찍이 서양(특히 유럽)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 쿠빌라이를 만났던 일이나,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에서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함께 책을 펴내고 역법을 만든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은 서양을 ‘양이’(洋夷)라고 불렀는데, 서양을 ‘바다오랑캐’쯤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중국이 동아시아 오랑캐를 ‘천하체제’에서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 것처럼 서양도 그렇게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는바, 중국인들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19세기의 서양세력은 훨씬 더 무시무시한 ‘오랑캐’였다.

근대 이전까지 세계사의 변방에 불과했던 서양(유럽)이 흥기하는 역사적 기점을 ‘대분기’(Great Divergence)라고 한다. 서양의 비교 대상은 중국이었는데, 그때까지 중국과 대적할 수 있는 문명은 없었다. 서양의 흥기는 석탄을 활용한 자원집약적 발전,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개척이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근대 유럽의 노선인 ‘열린 시스템’이 서양의 흥기와 세계 제패의 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유럽은 대항해 시대 이후 배를 타고 새로운 영토로 진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진출’은 ‘침략’이었다). 석탄 같은 자원을 무한정 활용하는 발전 전략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열린 시스템’이 여전히 세계를 작동시키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중국은 많은 인구를 활용하는 노동집약적 발전을 선택하는데, 대표적으로 ‘벼농사 경제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천하체제’에 따르면, 중국이 세계 그 자체이므로 이 세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세계에 한계가 있다면 자원은 무한정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아껴 써야 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끝내 ‘닫힌 시스템’을 고수했다. 중국인들의 ‘닫힌 시스템’은 명나라 영락제 시기 정화 함대가 인도양 원정을 중지하고 이후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하는 데서도 분명히 보여진다. 원나라 시대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도 있었던 중국은 결국 ‘세계’로 나아가지 않고 ‘천하’에 안주한다. 유럽과는 다르게 외부 식민지에서 자원을 얻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린 시스템’이 결국 역사에서 승리했다고 볼 수 있을까? 저자는 현재 전 지구적 기후ㆍ생태 위기의 원인으로 ‘열린 시스템’을 지목한다. ‘열린 시스템’에서는 제한과 한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세계는 유한하다.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발전 전략, 근대화, 전 세계의 서양화는 ‘탈근대’ 논의에서 ‘근대’(또는 ‘근대성’)를 비판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어떻게 보면 서양의 ‘열린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서양은 ‘열린 시스템’을 선택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 결과 ‘열린 시스템’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탈근대를 논의하는 현 시점에서 중국의 ‘닫힌 시스템’의 역사적 의의를 다시 성찰해보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