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음식문화 교류사 연구의 주요 쟁점들’ … 음식 민족주의를 넘어

[학술대회] - 2022 동북아역사재단 연례 국제학술대회 개최…“동아시아에서의 문화와 전쟁” - 동아시아에서의 문화와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2022-08-14     고현석 기자

 

동북아역사재단은 8월 11일(목)~12일(금) 양일간 “동아시아에서의 문화와 전쟁”이라는 주제로 “2022년도 동북아역사재단 연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8월 11일(목)~12일(금) 양일간 “동아시아에서의 문화와 전쟁”이라는 주제로 “2022년도 동북아역사재단 연례 국제학술대회(영문명: 2022 NAHF Annual Conference)”를 개최했다. 양일간 개최된 회의에서는 두 가지 화두를 논의했다. 첫 번째는 올해 가장 많이 논의되었던 중국의 “문화 원조(元祖)” 주장이고, 두 번째는 동아시아 내에서 일어난 “역대 동아시아 내 대전(大戰)“이다.

최근 중국 누리꾼들에 의해 제기된 중국의 “문화 원조(元祖)” 주장은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심지어는 유럽의 각국에 이르기까지 불필요한 논란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주요 문화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은 학술적인 근거가 박약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문화 주체가 다면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룩해 온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발전과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또한 한반도는 역사상 여러 차례 “동아시아 대전(大戰)”의 주무대가 되었는데, 최근 중국학계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각각 “일본과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원조한다”는 틀로 설명하려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되 한국과 한국인의 입장 및 역할을 축소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발생한 이들 전쟁을 각각 중일 간 그리고 미중 간의 대결로 치환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학술회의 첫날인 8월 11일(목)에는 동아시아 문화의 초국가적(transnational) 상호작용과 현지화에 대해 논의했다. 제1부에서는 “동아시아의 물질문화: 초국가적 상호작용과 현지화”를 주제로 진행했다. 조용민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리버사이드) 교수는 내몽골 카라 호토 유적지에서 발견된 직물의 격자무늬, 장남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고려청자, 마우리찌오 리오또 안양대학교 교수는 한국의 인형과 인형극을 주제로 동아시아 문화의 교류와 상호작용의 역사를 추적했다. 

제2부에서는 동아시아의 음식문화를 주제로 유진 앤더슨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리버사이드) 명예교수가 중세 아시아의 음식을 통한 동서양의 연결, 폴 뷰엘 미국 북조지아 대학교 교수가 몽골 제국의 정복자들이 아시아의 음식과 음식문화에 남긴 영향,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동북아시아 음식문화교류사 연구의 주요 쟁점, 정혜경 호서대학교 교수가 동아시아 음식문화 교류와 한식의 특성에 대해 논의했다.

둘째날인 8월 12일(금)의 제1부에서는 “임진전쟁: 근세 동아시아의 인력, 무기, 물류의 재고찰”이라는 주제로 총 4명의 발표자가 연구성과를 공유했다. 이정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조선의 관점에서 임진왜란 초기 지상전의 양상, 김경태 전남대학교 교수는 임진왜란 시기 군사 보급에 대한 비교 연구를 시도했다. 바렌드 노담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치대학교 박사후 연구원은 임진왜란이 명나라 및 조선의 화기 기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발표했고, 호리 신 일본 교리츠여자대학교 교수는 임진왜란 시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 군역체제를 어떻게 건립했는지를 고찰했다. 

제2부는 “한국전쟁과 동아시아 냉전: 대안적 서술의 모색”을 주제로 진행됐다. 백지운 서울대학교 교수는 장진호 전투의 서사를 중심으로 중국의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 내러티브를 재구성했고, 김태윤 서울대학교 선임연구원은 한국전쟁 시기 평양의 전시상황과 전후 복구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일본 리츠메이칸대학교의 나리타 치히로 교수는 한국전쟁과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황쯔진 대만 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해 발표했다.

 

특히 첫날 2부에서 발제를 맡은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동북아시아 음식문화교류사 연구의 주요 쟁점들’이란 제목의 발표를 통해 동북아시아 세 나라 사이에 일어난 음식문화 교류의 역사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를 다뤄 주목을 끌었다.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자국 음식뿐만 아니라, 유사한 요리법으로 만들어진 타국의 음식을 두고 음식 민족주의적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동북아시아 세 나라 사이에서 상호 대면 접촉 기회의 근소(僅少), 생활상의 상이, 그리고 공통어의 결여는 지난 천년 동안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지역적 통합보다, 상호간의 상이성(相異性)을 더욱 조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의 역사에서 공통의 문자는 ‘한문’이다. 하지만 세 나라의 한문과 한자 명칭은 결코 모두 같지 않다. 오히려 한자로 표기된 물건의 명칭, 즉 물명(物名)은 지역마다의 역사와 문화에 맞추어져 끊임없이 로컬화 과정을 통해 변용되어 왔다. 서로 같은 언어로 논의해도, 각자 머리에 떠올리는 음식과 요리법, 그리고 음식의 맛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다. 최근 세 나라에서 한국음식, 중국음식, 일본음식이 유행하고 있지만, 본고장의 맛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로컬화한 음식이 대부분이다. 

20세기 이후 동북아시아 세 나라가 제국·식민지·반식민지라는 정치적 상황 아래에서 세 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빌미로 끊임없이 상대방을 타자화시켜 왔다. 타자화의 결과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오해로 나타났다. 주 교수는 20세기 한국 음식을 식민주의, 전통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세계 체제, 세계화 담론이 뒤섞인 혼종의 산물로 본다. 식재료와 조리법의 이동, 사람들의 이주와 교류도 음식의 문화적 혼종을 가속화했다. 이 때문에 자국 음식이 최고라는 편협한 우월주의는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북아시아 음식문화교류사 연구의 주요 쟁점들을 살펴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킬 가능성을 열어보고자 한다. 아래에 주 교수 발표문 중 주요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 〈동북아시아 음식문화 교류사 연구의 주요 쟁점들〉 … 주영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 발견된 음식: 채소 절임 음식

         주영하 한중연 교수

음식의 제조법이 지닌 원리를 살펴보면, 어떤 음식은 ‘발견된 음식(discovered food)’이고, 어떤 음식은 ‘발명된 음식(invented food)’임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음식의 주재료가 달라도 건조·식초절임·소금절임 등의 저장 방법은 지구의 많은 지역에서 자생한 요리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제조된 음식이 바로 ‘발견된 음식’이다.

최근 한국과 중국의 네티즌 사이에서 큰 갈등을 일으킨 김치의 기원이 파오차이(泡菜)에서 유래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두 음식의 기본적인 제조법을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기본적인 제조법의 원리는 한국의 배추김치와 중국 쓰촨의 파오차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쓰촨 파오차이의 절임 매개물은 소금뿐만 아니라, 식초도 쓰인다. 소금과 식초 외에도 한국과 일본에는 간장·된장·술지게미 등으로 채소를 절이는 요리법이 있다. 채소 대부분을 소금·식초·간장·된장·술지게미 등으로 절이는 한국의 김치와 일본의 쓰케모노(漬物)는 그 제조법의 원리가 매우 유사하다.

이들 ‘발견된 음식’은 특수한 사건을 그치지 않으면 주변 지역으로 결코 전파되지 않는다. 발견된 음식은 재료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발견된 음식’은 심지어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고문헌에 제조법이 적혀 있다고 해도, 그 제조법이 전파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김치·파오차이·쓰케모노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스스로 발견하는 공통된 제조법에서 생겨난 ‘발견된 음식’임이 분명하다. 


▶ 발명된 음식: 대두 이용 음식

두부는 결코 ‘발견된 음식’이 아니다. 두부는 대두(大豆)를 물에 불려서 즙을 낸 다음, 이 즙을 끓여서 식물성 단백질을 추출한다. 여기에 응고제(凝固劑)를 넣으면 고체의 두부가 만들어진다.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는 석회수·간수(艮水)·식초 등을 사용해 왔다. 두부가 ‘발명된 음식’인 이유는 대두에서 수용성 식물성 단백질을 뽑아내고, 이 즙에 응고제를 넣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소비해온 음식 중에서 대표적인 ‘발명된 음식’은 두부를 비롯하여 간장〔醬油〕과 곡주(穀酒) 등이 있다. 간장의 주재료 역시 대두이다. 간장은 대두 속의 단백질을 효소로 만들고 여기에 소금물을 더하여야 완성되는 ‘발명된 음식’이다. 곡주 역시 ‘발명된 음식’이다.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의 술은 곡물류나 전분을 함유한 식물을 주원료로 만든 ‘전분 술’이다. 한국에서는 막걸리·청주·증류소주 등이 모두 ‘누룩’이라고 불리는 발효제가 곡물에서 추출한 전분을 알코올로 만들어낸다. 곡주의 제조에서 핵심 매개물은 누룩이다.

고대 중국의 누룩 제조법이 한반도에 소개되었고, 한반도에서 다시 일본열도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의 누룩과 술 빚는 방법, 즐겨 마셨던 술의 종류와 맛은 서로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지역마다 생산되는 곡물이 다르고, 물맛도 달랐기 때문에 즐기는 술맛도 달랐다.

‘발명된 음식’은 사람들의 이동을 통해서 주변으로 전파된다. 사람들은 음식의 요리법과 맛을 일종의 ‘밈(meme)’으로 마음속에 담고 모방을 통해서 확산시킨다. 특정 지역에서 ‘발명된 음식’은 사람들의 이동을 통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발명된 음식’의 이동을 두고도 음식 민족주의적 입장을 가진 학자들 사이에서의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 문자적 교류: 한자 음식 물명의 상이

나는 조선시대 성리학적 사유에 의해서 집필된 음식 관련 고문헌이 두 가지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음식과 관련 정책을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 당대에 실제로 행해졌던 식생활과 음식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앞의 것을 식량 정책을 줄여서 식정(食政) 관련 고문헌, 뒤의 것을 음식 풍속을 줄여서 식속(食俗) 관련 고문헌이라고 부른다. 식정 관련 고문헌은 식량 정책과 관련하여 대안적인 요리법을 주로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농서(農書)’로 분류되는 고문헌의 요리법이 식정 관련 내용이다.

조선시대 한문으로 쓰인 요리책의 레시피 대부분은 중국 고문헌에 나오는 내용이다. 간혹 조선의 상황을 ‘속’이라고 표기하여 적었다. 한글로 쓰인 요리책의 레시피 중에도 한문 요리책의 번역문이 적지 않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음식의 문자적 교류’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 고문헌의 레시피에 나오는 물명, 특히 음식 재료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도 똑같은 품종으로 재배된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한자로 쓰인 음식 물명의 사실성(factuality)을 알기도 어렵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 동북아시아 세 나라 사람들의 교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중국 문헌에 근거한 음식 물명의 뜻풀이와 범례는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 지식인의 한문이 문언(文言)과 구어(口語) 혹은 중국어와 조선어의 구분을 넘어서 현실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선 지식인이 실용서에서 사용했던 한자 단어나 문장은 각 지역의 문화에 맞춰 끊임없이 변용된 넓은 의미의 ‘문학의 시니틱(literary sinitic)’이라고 보아야 한다.

음식의 물명과 레시피 역시 시니틱의 한 결과일 수 있다. 이 현상을 전제하지 않은 채 고문헌에 나오는 음식 물명만을 근거로 삼아 조선시대 음식과 레시피 대부분이 중국으로부터의 일방적으로 전파된 결과물이라고 보면 안 된다. 각 지역에서 발견된 음식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evolution)의 과정을 거친다. 동북아시아 요리책, 그 중에서도 전근대 중국 요리책의 레시피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결과임도 살필 필요가 있다. 아울러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특정 지역의 발명된 음식 역시 로컬화의 과정을 밟는다. 


▶ 식사 방식의 변형과 지속: 숟가락과 젓가락

고려와 조선의 상류층이 지향했던 일상의 식단에서 중심은 밥과 국이었다. 밥과 국을 먹기 위해서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숟가락으로 밥과 국을 먹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먹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후에 숟가락 사용이 줄어들고, 젓가락 위주의 식사방식을 보였음에도 조선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인은 식사 때 숟가락과 젓가락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청동기 숟가락과 젓가락은 당나라 시기에 동북아시아의 지배층이 갖추어야 했던 위계적 식사도구였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인은 식사 때 젓가락, 그 중에서도 나무로 만든 젓가락만을 사용하고, 중국인 역시 젓가락, 그 중에서도 나무나 상아로 만든 젓가락만을 사용한다. 이에 비해 한국인은 왜 여전히 숟가락과 젓가락, 그것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수저를 오른손만으로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까?

한국의 학자 대다수는 한국인이 국물음식과 국물이 없는 음식을 언제나 함께 상에 차리기 때문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반드시 동시에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일본의 중국인 민족학자 슈닷세이(周達生, 1931~2014)는 한국인의 숟가락·젓가락 동시 사용을 성리학과 관련시켰다. 그는 숟가락으로 밥·국·찌개를 먹고, 젓가락으로 다른 반찬을 먹는 습관은 고대 중국의 『주례(周禮)』에 나오는 예법과 매우 닮았다고 보았다. 오른손 위주의 식사 역시 『소학(小學)』에 그 지침이 적혀 있다. 

하지만 밥을 짓는 주요 곡물이 멥쌀·보리·조·수수·콩 등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미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왕(Q. Edward Wang)이 주장한 고대 중국에서의 숟가락 사용의 이유를 수용할 필요도 있다. 그는 고대 북방 중국인의 주식이 곡물, 그중에서도 죽처럼 기장을 끓여 먹었기 때문에 식사 때 숟가락을 주로 사용했으며, 젓가락은 국속의 건더기를 집어 먹는 데 사용했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고대 일본인은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 시대에 지배층이 공식 연회에서 청동기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했지만, 일상 식사 때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을 가리지 않고 젓가락만 사용했다. 일본열도에는 이미 그때부터 차진 성분의 쌀이 재배되었기 때문에 밥을 먹을 때 굳이 숟가락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차진 쌀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면 오히려 밥알이 숟가락에 달라붙어 불편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이 먹었던 밥의 주재료는 멥쌀이었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따지면 현미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조선왕실의 임금도 여름에는 보리로 지은 밥을 먹었다. 곧 잡곡밥이 주식이었다. 현미나 보리로 지은 밥을 많이 먹으면서 숟가락의 쓰임새가 더욱 늘어났다. 보리밥은 지금의 자포니카(japonica)에 비해 거칠었다. 현미 역시 지금의 멥쌀처럼 점성이 적었다. 많은 양의 밥과 국을 떠먹는 데는 넓은 잎의 숟가락이 더 좋았을 것이다. 15세기경부터 사대부 남성은 독상에서 혼자서 식사하면서 코앞에 밥그릇을 놓았다. 식사 때 숟가락의 손잡이인 술자루가 짧고 곧은 숟가락이 밥을 먹기에 훨씬 편리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가리지 않고 남성은 청동기를 진화시킨 유기(鍮器, 놋, 구리에 아연을 넣어 만든 합금)로 만든 숟가락을 필수품으로 여겼다. 

미국의 언어학자 댄 주래프스키(Dan Jurafsky)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광둥(廣東) 지역 사람들은 ‘전분(starch) 음식’과 ‘비전분(nonstarch) 음식’을 서로 섞어 먹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고려시대 이래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의 ‘밥+국+반찬’의 식사 역시 ‘전분음식+비전분음식’의 결합이다. 다만 ‘전분음식+비전분음식’의 구조를 지닌 ‘비빔밥’과 ‘국밥’은 조선시대 이래 성리학적 의례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음식이다. 조선시대 이래 한국인은 ‘밥+반찬’의 ‘비빔밥’과 ‘밥+국’의 ‘국밥’을 일종의 간편식사로 즐겨 먹는다. 이 두 가지 식사 때 젓가락 없이 숟가락만이 유일한 도구였다. 

북미와 유럽인들은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식사방식은 음식 재료의 환경적인 차이도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에서 전해진 불교, 유교, 성리학을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어울리도록 변형시켜 왔다. 숟가락과 젓가락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 남는 문제 

한반도의 시선에서 보면 대단위 인적 이동은 다음의 시기에 주로 이루어졌다. 신라와 당의 연대가 이루어진 7~8세기, 원나라와 고려의 종속적 관계가 심화된 13~14세기,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전쟁이 일어난 15~16세기, 그리고 연행사(燕行使)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상징하는 한반도 지식인의 정기적인 베이징과 도쿄 혹은 오사카 방문이 행해진 18~19세기 등이다. 20세기 초반 ‘제국-식민지-반식민지’의 정치적 조건에서 진행된 인적 이동은 세계적 식품체제(food regime) 우산 아래에서 진행된 불평등 교류였다. 이 과정에서 그 전의 교류와 확연히 다른 일본식 산업 식품이 한반도와 중국대륙, 그리고 타이완에 이식되었다. 각각 다른 목적을 지닌 국민들이 타국으로 집단적 이동을 하여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면서 자국의 식재료와 요리법, 그리고 자국 음식점을 열었다. 오늘날 한국인이 소비하는 음식 중에는 중국음식과 일본음식이, 일본음식 중에는 중국음식과 한국음식의 요리법과 식재료가 보이는 이유가 바로 20세기 초반의 교류가 만든 결과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 세 나라 사이의 음식 민족주의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 1990년대 이후 세계 식품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동북아시아에서는 음식이 산업으로 바뀌었다. 음식은 더 이상 문화가 아니라 자본이 되었다. 결국 음식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지극히 자본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오늘날 문화는 자본 축적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동북아시아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가 일국(一國)의 범위를 넘어서 동북아시아, 더 넓게 지구사(global history)로 확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동시에 음식의 문화적 생산과 소비에 개입하고 있는 국가와 산업의 권력에 대한 비판적 음식학(food studies)이 동북아시아 지역민 사이의 호혜와 협력에 기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