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시대의 시선과 권력의 관계는?

2022-06-19     이명아 기자

■ 메타버스 시대에도 시선은 권력이다 | 박정자 지음 | 기파랑 | 288쪽

 

이 책은 시선의 이야기이면서 또한 권력의 이야기다. 푸코 철학 입문서이기도 하다. 푸코는 시선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고전적 권력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놓아 60~70년대의 프랑스 철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철학자였다. 하지만 푸코의 비대칭적 시선론은 이미 사르트르의 대타존재론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사르트르의 대타존재론은 또한 헤겔의 인정투쟁 혹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나오는 이야기다. 푸코의 이론을 소개하기 전에 저자가 우선 헤겔과 사르트르의 철학 이야기서부터 시작한 이유다.

푸코는 1984년에 타게 했으므로 권력의 감시 체제로서의 판옵티콘 이론은 사실상 디지털 이전 사회의 이야기다. 그러나 감시하는 시선이 생물학적 눈이냐 디지털 기기냐의 차이만 있을 뿐 권력과 시선의 관계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아니 디지털 시대의 감시가 더 철저하고 더 대규모적이고 더 가혹할 뿐이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들은 현대 사회를 전자 판옵티콘의 시대로 명명한다.

라틴어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는 뜻의 판옵티콘(Panopticon)은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구상한 감옥 건물 설계도의 이름으로,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름에 걸맞게 건물 가운데 있는 망루에서 간수 한 사람이 반지 모양의 원형 건물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감시한다.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간수에게 완전히 노출돼 있다. 하지만 죄수들은 중앙 망루에 있는 간수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망루가 어둡기 때문에 거기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언젠가 한 번 망루에 간수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24시간 내내 거기에 간수가 있거니 하고 짐작만 할뿐이다. 여기에 감시 권력의 중요한 원리가 있다. 즉 감시자의 존재는 편재(遍在)하되 확인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오늘날의 전자 감시 체제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도로 위, 주택가 골목 곳곳에 있는 CCTV는 현대판 판옵티콘이다. CCTV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어렵사리 피한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판옵티콘 속에 갇혀있다. 무심코 주고받은 이메일, 휴대폰 앱에 저장된 쇼핑이나 검색 기록들, 단톡방에서 나눈 대화들, 해지된 은행거래 내역 등이 언젠가 당신을 옭아맬 판옵티콘들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 국민이 식당이건, 병원이건 꼬박 QR 코드로 자기 동선을 국가에 신고하고 다니던 경험도 겪었다.

10여년 전만 해도 전자 판옵티콘은 고작해야 휴대폰이나 전자 사원증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로봇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가상 인간이 모델계를 석권할 기세고, 사람들이 꼼짝 않고 집에만 있으면서 가상현실 속을 거닐게 될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메타버스 시대의 도래가 예감되는 역동적인 순간이다.

시선의 문제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힘겨루기, 즉 권력게임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푸코의 권력 이론도,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도 그 뿌리는 모두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개념 속에 들어있다. 헤겔이 굳이 시선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그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또는 ‘인정투쟁’의 문제를 길게 살펴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푸코와 같은 세대인 데리다는, 권력의 문제에서는 조금 비켜나, 눈이 ‘보는 눈’만이 아니라 ‘우는 눈’이기도 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맹인의 기억』에서 문학과 미술을 통해 온갖 눈의 문제를 언급하고 나서였다. 눈은 본질적으로 ‘보는 눈’이지만 그러나 ‘우는 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보는 눈’이 감시하고 평가하는 냉혹한 눈이라면 ‘우는 눈’은 연민과 비탄의 따뜻한 눈이다. ‘보는 눈’이 저 높은 곳에서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눈이라면 ‘우는 눈’은 저 아래 낮은 곳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눈이다. 눈은 또한 욕망하는 눈이기도 하다. 

가시성이 문제였다. 가시성은 권력을 생산한다.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타인에게 바라보여진다는 두려움이 시선과 권력이론의 요체였다. 시선의 비대칭에서 권력이 발생한다고 푸코가 말했을 때, 그것은 많이 보는 사람이 지배자이고, 많이 보임을 당하는 사람이 종속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무대 위 혹은 TV 화면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사람이 권력이고, 무대 밑 혹은 TV 앞에서 시선을 보내는 다수는 힘없는 보통사람들이다.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는 사람, 다수에게 바라보여지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남에게 보여주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정보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이상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시선과 타자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연계시켰던 사르트르, 푸코 등의 이론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한 현상이다. 가시성의 무게중심이 이동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의 감시 욕구가 해체된 것도 아니다.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권력은 더욱 교묘하게 감시의 그물망을 조이고 있다. 우리는 더없이 발랄한 자유를 누리는 듯하지만, 실은 전방위에서 하루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며 살고 있다.

그 감시자는 누구인가, 감시하는 권력은 누구인가? 익명의 감시자는 국가권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며 우리 이웃이고 나 자신이기도하다. 현대사회에서 시선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전자기기의 뒤엉킨 전선만큼이나 복잡하다.

헤겔의 인정투쟁에서 현대 사회의 메타버스에 이르기까지 시선의 문제를 짚어 보는 것은 국가 권력에 대한 개인의 권리 주장이기도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냉혹한 시선이 되어버린 황폐한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