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세계질서와 문명등급이라는 유령

2022-05-23     이현건 기자

■ 세계질서와 문명등급: 글로벌 히스토리의 시각에서 본 근대 세계 | 리디아 류·탕샤오펑·량잔·장징·자오징화 외 7명 지음  | 교유서가 | 776쪽

 

오늘날 물리적·심리적 국경과 나라별, 민족별 문명의 서열화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온 것일까. 이 책은 철저하게 서구의 시선으로 형성되고 인식하게 된 지난 500년의 세계질서와 문명등급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비판, 반성과 새로운 연구방법을 개척하기 위해 각기 다른 학문적 배경을 지닌 11명의 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이룬 흥미로운 인문학적 결정체이다.

이 책은 주로 중국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적 문명론 및 근현대 중국의 사상과 가치의식에 대한 비판도 포함한다. 비서구의 많은 국가가 자국의 문화와 인물에 대한 서구의 평가를 갈구하며 문명국가로서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보인다. 서구 중심의 문명등급론은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이념으로 비판받아 지금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근현대 역사를 살펴보면 실은 더욱 완고하게 내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명과 문명등급론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지만,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일상의 언어에 유령처럼 스며든 채 떠돌면서 서구 사회의 눈을 의식하며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문제의식은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를 넘는 전 세계의 보편적 역사 인식에 관한 새롭고도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근대 이전에 국가의 경계는 지역 인간 공동체의 삶과 지리적 조건을 중심으로 규정되었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경계가 나뉜다. 국경은 단순하게 지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민족의 경계이고 문명의 경계이자 이념, 종교, 인종의 경계이다. 19세기 초 문명등급의 경전적 기준이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근대질서는 전 세계의 공통인식이 되었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와 같은 사회를 ‘야만국가’에 위치시키고,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사회를 ‘반문명국가’ 혹은 ‘미개화한 몽매국가’로 정의하며, 유럽과 미국 기독교 사회를 ‘문명국가’로 자리매김시켰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인류의 삶의 방식을 여러 등급으로 서열화한 것은 서구의 지리적 확장과 패권적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출현하여 탈식민화가 이뤄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책의 주편인 리디아 류 교수는 지정학의 이중구조와 그 역사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식을 모색함으로써 복잡하게 변화하는 세계의 혼란에 대처하고, 미래의 세계질서를 새롭게 구성하자고 말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방법론으로 다섯 가지의 설명을 덧붙인다.

첫째, 국가, 지역,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담론실천이 어떻게 현재의 세계질서를 창출했는가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자국의 역사를 배제하는 세계사 연구와 타국의 역사를 다루기 힘든 국가별 역사 연구자들의 사각지대를 보완하기 위한 ‘글로벌 히스토리’는 국가별 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지 않고 자국의 역사를 전 세계의 지정학 범위 안에 두어 상호추동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셋째, 추상적 사상에 대한 설명이나 분석이 아니라 사상을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언설, 글쓰기 및 기타 실천(숫자도표, 국제조약, 도상, 시공의 조직방식 등을 포함)으로 간주하여 이러한 행위실천이 어떻게 사회에 진입하고 학과를 만들며, 인심을 움직이고 변화를 추동하거나 역사를 창조하는가 등을 연구한다. 또한 개별 학문의 한계를 넘어 융합적이고 다언어적인 탐구를 통해 각종 역사와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넷째, 연구자의 입장에서 학과의 정통을 지키려는 폐쇄적이고 수구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탐구를 위해 근대 학과를 개방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지닌다. 다섯째, 글로벌 히스토리의 시각을 갖추기 위해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언어로 된 1차 문헌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세계적 최신 학술 성과를 파악해야 한다.

문명등급론이 글로벌 히스토리 연구의 중심 문제로 제기된 주된 원인은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학과와 같은 시기에 출현하여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문명론과 근대 학과는 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식민체계의 전파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문명과 야만에 대한 근대시기의 구분은 국제법의 사상적 기초였으며, 이는 근대 세계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관건 가운데 하나이다. 리디아 류는 문명등급의 출현을 연구함으로써 국제법의 출현과 국제법이 어째서 처음부터 줄곧 세계 통치와 관련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 책은 근대 문명등급론의 형성과 동아시아로의 전파과정을 비롯하여 지리학적 발견, 국제법 체계, 언어, 여성권리, 만국박람회, 식물학, 인류학 등 다양한 근대 학문과 지식에 문명등급론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중국의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특히 식민지 확장기 유럽 근대성의 위선적 문명에 대한 풍경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근대 문명등급론의 의미는 단순히 개념적, 학술적 의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기에,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인류의 의식을 구성하고 변화시켰으며, 세계질서의 변화와 어떻게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