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레토릭에서 현대 디지털 레토릭까지

2022-04-10     강상현 연세대·커뮤니케이션학

■ 옮긴이에게 듣는다_ 『레토릭의 역사와 이론』 (제임스 A. 헤릭 지음, 강상현 옮김, 컬처룩, 628쪽, 2022. 02)

 

상징을 통한 효과적 설득 행위로서의 레토릭 

“레토릭”이라는 단어는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어떤 때에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가 하면, 또 어떤 때에는 실무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번지르르한 말로 남을 현혹시킬 때 그런 말을 “한낱 레토릭에 불과하다”고 폄훼하는가 하면, 매우 조리있고 감동적인 말로 다른 사람들을 잘 설득할 때 “레토릭에 능하다”고 상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토릭”은 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말이나 글과 같은 언어는 물론, 그림, 조각, 건축, 음악, 춤 등 모든 상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기술을 레토릭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기술에는 사물 배치(layout)나 오늘날의 전자 언어까지도 포함된다. 설치 예술과 같이 어떤 사물을 특정한 모양과 위치로 배열함으로써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한다거나, 디지털 영상 처리를 통해 누군가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경우까지도 레토릭의 범주에 넣고 있다. 즉 다양한 상징체계를 이용한 효과적인 설득 행위와 과정 및 그와 관련된 기술과 연구까지도 레토릭의 범주에 넣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레토릭은 상당히 폭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특히 ‘상징’과 ‘설득’이라는 키워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스의 말하기 레토릭에서 현대 디지털 레토릭까지

레토릭에 대한 그러한 개념 정의에 입각해서 이 책은 레토릭의 장구한 역사와 함께 관련 이론들을 폭넓게 탐색하고 있다. 첫 장에서는 레토릭의 개념과 특징 및 사회적 기능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한 다음, 두 번째 장에서는 레토릭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다음 장부터는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소피스트간의 레토릭 논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레토릭 이론을 다룬 데 이어, 고대 로마와 중세, 르네상스 시기와 계몽주의 시대의 레토릭에 관한 각 시대 주요 이론가들의 인식과 주요 담론들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3개의 장에서는 근대 이후 현대까지의 레토릭 현상과 관련된 사상과 이론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현대 레토릭과 관련해서는 과학 레토릭과 포스트모던 레토릭, 페미니즘 레토릭, 사물 레토릭, 영상 레토릭, 디지털 레토릭 등 현대적인 언어와 사상 및 상징과 연관된 레토릭 현상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서방 세계 중심의 레토릭 역사와 이론을 소개하고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비서방 세계의 전통적인 레토릭 현상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어, 그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시사하고 있다. 


시대에 따른 레토릭의 위상 변화

초기의 레토릭은 당연히 말하기 레토릭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얘기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말을 통한 효과적인 설득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당시에는 주된 소통 매개로 이용되었던 상징체계가 대부분 말이었기 때문이다. 말은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거나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도 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말하기 기술은 개인의 출세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중심적인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기술로 인식이 되었다. 이러한 말하기 기술로서의 레토릭을 둘러싸고, 이에 반감을 가졌던 -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 당시의 전통적인 그리스 지식인층과 레토릭 기술 교육을 중요한 생계 수단으로 삼았던 외래 지식인 그룹인 소피스트들 간의 다툼은 레토릭을 둘러싼 논쟁사의 중요한 출발점을 이룬다. 플라톤에 의해 비난받고 폄하되었던 레토릭의 지위는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철학의 변증법과 대등한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레토릭》에서 레토릭의 개념과 위상, 레토릭의 유형과 구성 요소, 그리고 레토릭 능력을 제고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레토릭》은 고대 로마의 키케로에게로 이어지면서 서방 세계의 레토릭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의 레토릭 이론을 근간으로 하는 긴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레토릭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레토릭은 민회와 법정에서 설득력 있는 말하기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상징 관리 기술로 출발했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기술을 출세를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기술은 아테네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도시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로 여겨졌다. 따라서 레토릭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도 강조되었다. 그것은 고대 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민주적인 정치 논쟁은 제약되었지만, 로마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설득 기술로서 역시 레토릭은 중요했다. 로마 통치 세력의 구성원이자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도 레토릭 교육은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거치면서 정립된 초기 레토릭 이론은 그 이후의 레토릭 관련 논의의 초석이 되었다. 다만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레토릭이 갖는 상대적 위상은 물론, 레토릭의 여러 요소 중 강조하는 바가 달라지곤 했다. 

중세 시대에는 레토릭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중세에 득세한 기독교가 레토릭을 불신하고 적대시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관점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전통적인 레토릭은 이교도의 산물이자 청중을 조작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기독교를 박해했던 세력과 깊이 관련된 상징 조작 기술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레토릭은 기독교적 필요에 새롭게 적응했다. 교리 전파와 신앙 강화를 위해서도 레토릭은 필요했다. 따라서 중세의 말하기 레토릭은 설교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는 사이 문자 교육이 점차 확대되면서 편지쓰기와 같은 서간술과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시작술(詩作術) 등 글쓰기 레토릭이 발전해 갔다. 말 중심이던 데서 글 중심으로 이행되는 그러한 상징체계의 변화는 르네상스와 근대 계몽주의, 그리고 현대로 올수록 보다 다양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보다 다양한 서사는 물론 각종 영상과 디지털 기술 등은 효과적인 설득을 위한 상징체계의 다양성을 크게 증가시켰다.


레토릭과 여러 학문 및 사상 조류와의 관계 

이 책은 상징체계의 변화와 다양성 증가에 따른 레토릭의 위상 변화뿐만 아니라 레토릭이 여러 학문과 갖는 관계, 그리고 레토릭이 사상사적 조류와 갖는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즉 레토릭이 그리스의 고전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언어학, 심리학, 사회학, 신화학, 문학, 커뮤니케이션학 등과 갖는 관계는 물론 심지어는 의학과 자연과학에서의 레토릭에 관한 논의도 함께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현대 사상사에서의 신조류라 할 수 있는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해체주의에서의 레토릭 논의 경향과 함께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의 사물 레토릭에까지 레토릭 논의를 확장시키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레토릭의 긴 역사적 흐름 속에서 레토릭 이론가나 학자들이 레토릭의 어떤 국면에 주안점을 두면서 레토릭 연구가 변화되어 왔는지도 다루고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레토릭이 상징체계의 생산(자) 영역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근현대로 올수록 수용(자)의 심성과 취향에 대한 고려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되었다든지, 초기 레토릭이 공적 영역에서의 주장과 논쟁에 초점을 맞추던 것이 보다 최근에 올수록 사적 영역에서의 일상적 레토릭과 표현, 전달, 스타일에 더욱 관심을 보이는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는 분석이 그런 예들이다.


레토릭에 대한 학술적 이해와 실천적 지침 

따라서 이 책은 우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 디지털 시대에 이르는 동안의 레토릭 전반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레토릭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징을 통한 효과적인 설득 행위와 과정 및 그와 관련된 기술로서의 레토릭에 대한 수많은 레토릭 전문가들의 생각과 주장들을 소개하고 분석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다양한 상징체계를 활용하여 본인이 바라는 효과적인 설득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보다 실천적인 지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상현 연세대·커뮤니케이션학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정보학회장과 한국방송학회장, 미디어공공성포럼 운영위원장과 공동대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커뮤니케이션과 사회변동》, 《정보통신혁명과 한국사회: 뉴미디어 패러독스》, 《크리스티안 푹스의 초국적 정보제국주의 비판》, 《대중매체의 이해와 활용》(편저), 《지배권력과 제도언론》(역서)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