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재판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2022-03-20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㉘_ 조선시대 재판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

 

재판 기록 속 유럽

한동안 20여 년 전에 번역된 유럽 중세사 관련 두 권의 저작이 주목을 끈 바 있다. 먼저 『치즈와 구더기』(문학과 지성사, 2001년)는 이탈리아 출신 역사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가 1975년에 집필한 책으로,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에 사는 메노키오라는 방앗간 주인의 삶과 우주관을 다룬 저술이다. 메노키오는 당시 예수의 신성,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단 혐의로 피소되어 결국 교황청의 명령으로 화형(火刑)에 처해지는데, 이 책은 15년의 간격을 두고 진행된 그에 대한 두 차례의 재판 기록을 토대로 메노키오의 행적과 사고를 치밀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프랑스 근대사를 전공한 미국 역사가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가 1983년에 쓴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2000년에 출간된 한국어판 번역서의 부제 ‘역사가의 상상력이 빚은 16세기 프랑스의 생생한 생활사’가 말해주듯이 16세기 프랑스 사회의 농민과 농촌 생활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책의 내용은 1981년에 제작된 동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것처럼 1540년대 랑그독에서 한 부유한 농민 마르탱 게르가 집을 나갔다가 수년 만에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그가 돌아오고 몇 년 후 진짜 마르탱 게르가 다시 나타나고 마침내 가짜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끝내 사형에 처해지는 이야기이다.

 

『마르탱 게리의 귀향』과 유사한 모티브로 조선에서도 가짜가 나타나 사람들을 속이다가 강상사건으로 비화한 이야기가 백사 이항복(1555∼1618)이 쓴 ‘유연전(柳淵傳)’이다. 사진은 이 유연전을 분석한 강명관의 저서 『가짜 남편 만들기』이다.

이들 두 저작의 기본 사료가 재판 기록이며, 이를 중심으로 저자는 그간 역사 서술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왔던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복원해내고 있는 것이다. 즉 『치즈와 구더기』의 경우 메노키오를 이단으로 심문한 종교 재판 기록을, 『마르탱 게르의 귀향』의 경우 마르탱 게르를 사칭한 한 농민에 대한 형사 재판 기록을 각각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농민들의 생활, 문화, 세계관을 파헤치고 있다.


조선판 이단 신문 기록 『추안급국안』 

그렇다면 조선시대 형사재판 기록은 어떤 모습일까? 조선시대에도 사건의 유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수사, 재판 기록이 전해진다. 그중에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과 같은 이단에 대한 종교재판 기록과 가장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다.

이 책은 왕실을 둘러싼 역모나 변란, 당쟁과 같은 중대 국사범들에 대해 특별사법기관의 일종인 국청(鞫廳)을 열어 신문, 재판한 기록이다. 당쟁을 배경으로 다루는 사극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사건들은 대부분 이 책에 실려 있다고 보면 된다. 또 중세 유럽의 종교 재판처럼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 신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사건들도 제법 나오는데, 이 밖에 궁궐이나 왕릉에서의 관물 절도사건, 괘서(掛書) 사건, 지방 고을 객사에 걸어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훼손 범죄, 존속 등에게 패륜을 저지른 강상죄인(綱常罪人) 사건 등도 몇몇 사례가 책에 등장한다. 조선후기의 여러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이 책은 선조대부터 고종대까지 약 300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추안급국안』의 본문 기록 일부. 규장각 소장.

조선시대 농민들의 경우 기록의 생산과 정보의 습득이란 측면에서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사료에서 이들의 존재양태를 밝혀줄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추안급국안』과 같은 재판 기록에서는 그간 역사의 뒤켠에서 그 모습이 가려져있던 민중들이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실감나게 등장, 혹은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인사건 수사, 재판 기록

방금 살펴본 추국에 관한 기록과 함께 주목해야 할 자료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살인사건 수사, 재판 기록이다. ‘살인자사(殺人者死)’라는 말이 있듯이 살인 행위는 형량이 사형에 이르는 범죄로 당대에도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이 살인사건 수사, 재판 기록 중에는 『심리록(審理錄)』이 있다.

이 책에는 국왕 정조가 재위기간 중 심리한 살인 등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수 판례 1,112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정조대의 형사 판례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반면 이 책이 국왕의 판부(判付), 즉 정조 판결문을 중심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지방의 수령, 관찰사가 작성한 수사 단계의 기록이 소략한 약점이 있다. 

 

       심리록: 기재 형식이 다른 『심리록』이 규장각과 장서각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사진은 장서각 소장.

다음으로 『심리록』 기록의 약점을 부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것이 『흠흠신서(欽欽新書)』이다. 이 책은 다산 정약용의 개인 저술로서, 정조대의 사건 판례뿐 아니라 중국 측 사건, 정약용 자신이 황해도 곡산부사와 형조참의를 지내면서 직접 처리한 사건 기록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편 최종 판결 결과는 보여주지 못하지만, 지방에서 발생한 개별 살인사건에 대한 검시 및 수사 내용을 보여주는 고종대의 검안(檢案)이 서울대 규장각에 500 여종 넘게 소장되어 있다. 2018년에 경인교대 김호 교수가 쓴 책 『100년 전 살인사건』이 바로 이들 검안을 분석한 내용이다. 


사건에 나타난 조선 사람들의 삶은?

현존하는 조선후기의 형사재판 기록 중에는 유독 살인 등 인명사건에 관한 수사, 재판 기록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왜 다른 재판 기록에 비해 살인·자살에 관한 기록이 이렇게 많이 전해지는 것일까? 

이는 조선시대 형사재판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당시 살인사건의 경우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지방에서 수령이 사건을 수사하더라도 최종 판결은 관찰사를 거쳐 국왕이 내리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러 단계의 관리들이 해당 사건을 수사 지휘, 심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서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고 이 중 일부가 현존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관찰사 검시장계: 충청도 관찰사 민치상이 조정에 올린 문서. 1867년에 도내 살인범이 갑자기 사망하자 시체 검시를 하고 그 결과를 고종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장서각 소장.

서두에서 언급한 『치즈와 구더기』,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재판 기록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중세 유럽의 평범한 민중들의 삶, 의식, 세계관, 생활상을 잘 묘사한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어떨까? 조선시대의 재판 기록을 세밀하게 분석한다면 그동안 소홀히 다루었거나 도외시했던, 심지어 은폐되었던 당대 농민들의 삶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물론 현재까지 이들 자료에 대한 분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전적으로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관련 기록들과 함께 검토된다면 당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좀 더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관련 전문가들의 활약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