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건축과 하이데거』가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다

2021-10-17     이동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 나의 책, 나의 테제_ 『근대 건축과 하이데거: 모더니티의 시작에서 건축적 형태와 세계』 (이동언 지음, 산지니, 256쪽, 2021.08)

 

내부와 외부

동양에서는 관상학이라는 것이 있다. 관상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환경을 감지한다. 사람의 얼굴에 과거, 현재, 미래의 기운이 흐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시간을 안다는 것이다. 얼굴은 시간과 맥락을 압축한 것이다. ‘이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즉 시간과 맥락이 어떻게 흘러왔는가’ 하는 것은 얼굴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시간과 맥락은 사고 간에 섞여 누적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나아가 미래를 상상을 통해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이데거도 이와 유사한 사유를 한다. 어떤 지역에 가서 시간의 흐름을 땅에서 감지할 수 있으며 하늘, 땅,  멸자, 불멸자가 하나의 맥락의 질을 형성하여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인간이 하늘, 땅, 멸자, 불멸자와 상호 융합되어 기운을 일으킨다. 공간과 시간에 형성된 이 기운은 사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고 융해된다. 시간이 공간과 인간에 의해서 융해될 때 불멸자라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사람의 가슴에 꿈틀거린다. 이 꿈틀거림을 재창조라 한다. 공간과 인간의 멸자가 정서와 합류하여 존재를 만든다. 여기서 정서라 함은 어떤 특정 지형의 지역성 즉 지역의 분위기이다. 지역의 분위기는 공간, 멸자, 불멸자, 시간이 갖고 있는 항상적 존재다. 변치 않는 시간 속의 존재가 시간을 나아갈 때 분위기가 부풀린다. 전통이 부풀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치가 정교하게 증대된다. 문화가 발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건축물이 있다면 인간의 창조성에 의해서 가치가 증대되어 날로 빛나게 되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1889년 ~ 1976년

하이데거는 분위기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본다. 관계 바깥이란 외부를 이야기하며 관계 속이란 분위기가 문화의 내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맥락 내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맥락 바깥이란 맥락의 모양새를 나타내지만 맥락 내부란 맥락의 질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로 통하며 상호 관입되어 있다.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는 것은 맥락의 질이다. 맥락의 질은 유동하는 본질이다. 맥락의 질의 단면은 고정적이다. 맥락은 텍스트가 상호 교호 작용을 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맥락은 고착시킬 수 없다. 이것을 맥락의 흐름이라 한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진리란 맥락의 한 점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이고 끊임없이 변한다. 후설은 맥락 없이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한다. 이는 바닷물에서 한 점으로 묶으려는 행위와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상호관계에 의해서 본질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정적으로 어딘가 진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본질주의자와 상대주의자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설은 하늘, 땅, 나무, 물 등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본질주의자는 상호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 허구의 이름일 뿐이다. 이들이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본질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본질은 분명히 존재한다. 만물은 관계에 의해서 본질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본질이 생성되는 동안 관계가 변하고 흘러간다. 관계가 바뀌면 언제든 본질이 바뀌기 마련이다. 때에 따라 땅이 하늘이 될 수도 있고 나무가 물이 될 수도 있다. 이 과정이 후설에 의해서 에이도스(Eidos)라 불리며 고정된 진리를 갖는 것처럼 표현된다. 영원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한다. 사물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진리는 한둘이 아니라 무한하다. 진리는 세계 속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 해야 할까? 왜 건축가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가? 건축도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세계의 진리가 필요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점에 착안하여 고정되고, 변화가 없는 후설의 진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본질/상대/진리

하이데거는 맥락과 텍스트들은 관계가 무한하다고 봤지만, 후설은 텍스트들을 고정화시켜 하나의 궁극적 진리를 추구했다. 하이데거는 맥락에 관계없이 본질주의만 강조되면 흐름(flux)은 무시된다고 주장했다. 흐름도 살리고 존재도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이 문제의 해결은 두 개를 존재와 흐름으로 묶음으로써 생긴다. 존재의 적분을 잘못하면 쓸데없는 흐름이 생기지만 미분을 잘못하면 다양성 상실이 생기기 쉽다. 흐름을 존재와 결합함으로써 건축의 수 십 세대 간 이루어지는 장기적 목표가 상실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미분화되어 따로 놀게 된다. 지역성은 적당한 미적분의 네 가지 요소가 상호 관입할 때 일어나고 살아난다. 

형태와 형상

이 책에서 저자가 독자들을 위하여 고흐의 그림에서 착안한 생각은 아래와 같다. 고흐의 “농부의 구두”에서의 큰 흐름은 존재와 시간의 관계다. 존재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고 흐르는 것은 시간 때문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고흐의 “농부의 구두”는 이러한 사실을 자명하게 드러내 준다. 이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변하는 자연의 원리를 감지한다는 것이다. 

                              고흐의 "농부의 구두"

즉 존재와 인간이 상호 관입하는 순간에, 수용자에게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와 인간의 섞임이고 맥락의 질이다. 수용자는 맥락의 질을 이미 수용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맥락의 질은 지역 내의 하늘, 땅, 멸자, 불멸자로 구성되고 수용자가 도약하며 보존하고 있다. 고흐의 “농부의 구두”에서 인간의 가치관이라는 불멸자가 각각 상호 조응하여 맥락의 질이 올라간다. 맥락의 질이 올라갈수록 인간의 가치관과 자연이 예리하게 다듬어지면서 잠재된 것은 재창출하게 된다. 수용자의 잠재된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재)창조라 부른다. 그러므로 창조란 문화를 ‘정교하게 하여’ 질을 높이는 것이다. 곧 창조는 문화의 질의 핵심이다. 

가령 예술 작품을 보고 뭉클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보편적이고 1:1 대응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 사물과 상호작용을 통해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건축 사건의 시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뭉클하다는 것’은 사물과 상호 작용이라는 사건을 통해 감동을 받는 것이다. 뭉클하는 것은 수용자에게 공동적인 정서인 세계의 진리가 존재하므로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뭉클함은 건축을 포함한 예술 분야의 핵심인 지혜로서 진리다. 그러나 뭉클함은 현상적 기반위에 초월적으로 생긴다. 이 점에서 창조적 기반은 일시적 감정의 흐름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르트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흐름 속에 하늘, 땅, 멸자, 불멸자가 교호작용을 하는 아우라는 공동적인 정서와 개별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다. 공동적인 정서는 각 수용자와 창조자가 다른 방식으로 수용할지라도 동일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다양성 속의 다름을 지닌다. 다양성 속의 다름은 아우라로부터 유래된다. 아우라는 우연성 속에 일어나는 무한한 덧댐이다. 바로크 시대 이후에 아우라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고대-중세-근대를 잇는 큰 축의 하나인 아우라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이는 상징의 사라짐이다. 

상징의 사라짐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와 스티븐 페퍼 비교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전체 미학을 아우르는 현상적 뿌리를 근원적으로 다룬 바 있으며 이를 시학적으로 풀었다. 페퍼는 세계를 네 가지 패러다임으로 나누고 이를 분석적으로 도식화시켰다. 세계는 네 가지 패러다임으로 구성되는데 역사의 발전 순으로  ‘형식주의 Formism: 질적 불변의 법칙, 기계주의 Mechanism: 양적 불변의 법칙, 유기주의 Organicism: 목적 불변의 법칙, 맥락주의 Contextualism: 가설 불변의 법칙’에서 생각이 나온다. 이는 관계에 의한 것으로 외부의 겉모습에 의한 분류다. 이와는 달리 하이데거의 시학은 외부의 겉모습이 아닌 진정한 사건으로서 예술 작품으로 비교하자면 내부를 뭉클하게 하는 무언가가 상호 관입이 되어 진정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관계, 하이데거의 시학은 ‘관계들의 관계’이다. 현상 과학과 현상화의 뿌리는 모든 것이 상호 관입인 ‘관계들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현상적 뿌리를 탐구하다가 발견해낸 것이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을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상호 관입의 ‘관계의 관계’의 세계이다. 네 개의 패러다임의 한계는 바로 사물로부터 나아가 삶을 이탈하는 것이다. 상징, 알레고리, 패러다임, 정보, 지식 순으로 상호 밀착 되어있다.

이 책은 스티븐 페퍼의 “World Hypotheses”를 하이데거의 시학적 관점으로 살펴보고 사유의 방식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창조적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하이데거의 사건은 표피적 및 심층적인 사유를 포함한다. 우선 표피적인 사건은 패러다임을 안고 있다. 표피적인 사건은 도구적인 것까지만 포함되지만, 심층적인 사건은 진정하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현상을 초월적으로 가로지른다는 것이다. 고로 심층적인 사건은 실존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구적 사건은 기물이고 예술품은 심층적이므로 이로써 도구와 예술품을 구분한다. 도구는 일회적 관계에 의해서 유용성이 사라지므로 소모성으로서 구분되고 그것과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예술은 갈수록 반짝이는 빛을 내면서 예술성을 지닌다. 결코 소모되지 않는 질성의 아우라가 건축의 빛을 뿜는다. 근대 사회에 돌입하면서 이 아우라의 망각과 상실이 일어나는 현상은 또 하나의 장인술이였던 건축을 포함하는 근대 예술의 전반의 문제점이라 칭할 수 있다. 한편, 근대 건축의 대가들인 르 꼬르뷔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 로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이미 통찰하고 지역성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역성에 존재하는 낯섦과 낯익음의 선택인 고독 속에서 예술작품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싶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고독을 낯섦과 낯익음 속에 둘러쌓인 우연성이라 해석한다. 고독이 익숙함으로 표현될 시에 낯섦은 일시적이다. 바로크 이전의 지혜의 삶을 의미하는 알레고리는 고독과 낯섦은 인간의 전의식(preconsciousness)에서 만나는데 그 의식은 창조의 기초를 만든다. 게슈탈트 심리학에 의하면 맥락에 따라 무한의 정의가 내려진다. 맥락마다 상대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 환경이 바뀌면 진리도 달라진다. 이로써 개념은 유한하고 창조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건축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창조와 모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창조적 모험의 세계를 통해 사건을 일으키고, 즉 하늘, 땅, 멸자, 불멸자가 구성요소가 되고 마침내 근대 건축의 핵심을 이룬다. 이미 시작된 구도의 끝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재료가 돌출(setting forth)을 만나서 형태를 만들고(setting up) 분열(setting out)되고 제안(setting down)하고 되돌리며(setting back) 이 세계를 거대한 형태로 만드는 구조에서 하이데거의 미학이 근대 건축에서 보여주는 창조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형태가 하늘, 땅, 멸자, 불멸자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형태는 반 이상은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인간의 친밀함이 형태의 손을 대어 자연을 만듦으로써 개인에 따라 지역에 따라 형태가 낯익은 듯하면서 낯설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에 지역과 개인이 전부 다르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낯섦과 익숙함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남으로써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창조를 개인 고유의 개성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임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따라서 창조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은폐되어 있는 것은 드러내야 한다. 어디까지가 낯섦이고 익숙함인지 밝히면 둘이 적절히 섞이면서 상호 관입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형태는 형상을 앞질러 만들어진다. 형태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만든 형상과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관계는 시작과 동시에 돌출하는 순간 낯익음도 아니고 낯섦도 아니다. 형태가 개별화 할수록 낯섦은 낯익음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돌출, 출발, 갈라섬, 제안, 복귀 등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미지는 항상 그것들과 더불어 있다.

결론

전술한 것이 하이데거의 시학의 대략적인 골격이다. 저자가 하이데거의 시학이라는 예술론을 총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시학은 예술론이다. 시학이라는 이름으로 붙인 이유는 낯섦과 낯익음의 언어상의 관계 때문이다. 시란 일상생활에서 쓰는 낯섦과 낯익음의 묘한 조합이다. 즉, 낯섦과 익숙함이 시인의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무한히 열려있다. 건축을 시라고 본다면 건축이란 시의 핵심과 또다른 일상어와 낯선 언어의 결합이다. 건축도 이와 같은 궤도 형성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어 나간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무한히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공감대가 있어야한다. 공감대의 핵심에는 전통이라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숨어있다. 전통을 기반으로 확대하고 옆으로 뻗어나갈 때 만이 ‘놈’은 빛난다. 놈의 알레고리와 상징은 근대에 들어와서 갈라서기 시작한다. 

여기서 알레고리, 패러다임, 정보는 상징에 의해서 정보의 극으로 진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축소된다고 본다. 이 책은 서사 이성에서 상징으로 나아가는 바를 다루었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징, 알레고리, 패러다임, 정보의 위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은 콜라주와 몽타주를 통해 서사 이성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다. 콜라주는 시각적 요소를 띄고 몽타주는 촉각적 요소를 띄면서 두개가 결합하여 서사 이성을 담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서사 이성만 남고 알레고리는 축소됨으로써 아우라가 점차 사라진다. 마르셀 뒤샹은 콜라주와 몽타주에서 서사 이성에 의하여 빠뜨린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한 사람이다. 근대 건축은 이와 같은 큰 골격에서 형성된다. 상징과 알레고리가 얼마나 왜곡되고 비틀렸는지 알 수 있다.


이동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 및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 및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이다. 관심분야는 ‘현상학적 맥락’에 바탕을 둔 건축설계 및 이론·비평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맥락주의 건축이론화 하기」, 「우리건축의 기본방향설정을 위한 현상학적 탐색」, 「물려받는 것(傳承)에 바탕을 둔 현대건축」(공저) 등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삶의 건축과 패러다임 건축』, 『詩를 통해 부산건축 새롭게 읽기』, 『한국현대건축의 정체성탐구』(공저), 『건축 詩로 쓰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