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하는 기차를 우리는 돌릴 수 있을까?

2021-09-27     정혜진 이화여대·기독교학

■ 서평_ 『가장 오래된 과제: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생각하다』 (에릭 T. 프레이포글 지음, 박경미 옮김, 한울, 360쪽, 2021.08)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 19 팬데믹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이것이 우리인류에게 닥친 재앙의 전부가 아니겠다는 실감이 든다. 지진, 쓰나미, 홍수 같은 자연재해의 소식들은 물론 지구상 어딘가에서 터잡고 살아가던 생명들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멸종의 소식까지, 그동안 생태적 위기에 대한 경고는 사실 너무도 많았다. 코로나 팬데믹은, 불길했지만 멀게 느껴졌던 예감(豫感)을 피부 깊숙이까지 닿는 절감(切感)으로 바꾸고 있다.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삶의 안정성에 대한 확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이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근본적인 대책이 있기나 한 걸까?

‘근본적인’ 것은 될 수 없겠지만, 작은 실천이나마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르겠다. 생태적 위기를 부추겨온 안일한 삶의 방식을 하나라도 바꾸고, 나아가 이 위기의 극복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해 나가자고 연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런 실천의 하나일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기독교계 한 환경운동 단체에 회원으로, 그때그때 제기되는 여러 환경 문제들에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그리고 강의를 할 때는 기독교 전통이나 성서를 오늘의 생태위기와 관련시켜 한두 시간이라도 다루려고 준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파국을 향해 가는 듯 보이는 현실에 죄책감이라도 덜어보려는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실은 ‘이것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의문과, 이미 크게 어긋나 버린 방향을 이런 작은 노력들을 모아 돌이킬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무력감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7월 말에 출간된 에릭 프레이포글(Eric T. Freyfogle)의 『가장 오래된 과제』(박경미 옮김, 한울)는 그간 막연하게 생각해 왔지만 혼자 정리할 수는 없었던 뒤엉킨 의문들을 가닥가닥 풀어서 설명해 주는 좋은 책이다. 법학교수였던 저자 프레이포글은 환경보전의 이슈로 30년간 고민하고 연구해 온 결과를 정리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책 제목은 미국의 자연보존주의자이면서 『모래군의 열두 달』로 잘 알려진 알도 레오폴드(1887~1948)에게서 따온 것이다. 레오폴드는 땅, 곧 흙과 바위뿐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인간과 생명 공동체 전체의 존재 기반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땅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도전을 “가장 오래된 과제”로 부르곤 했다.  

책의 부제,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생각하다”는 저자가 바로 이 “가장 오래된 과제”를 근원적인 관점에서 풀어감을 보여준다. 그는 생태 위기를, 파편화된 문제들과 그 원인을 해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적, 행정적 노력들을 요청하거나 실행하는 차원에서 서술하지 않는다. 그에게 생태위기는 근본적으로 규범적 가치나 도덕을 포괄하는 문화 전체를 검토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생태 위기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심으로 발전된 근대적 가치관과, 이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과학적 객관성에 집착하는 합리주의는 이 둘을 비판하는 적절한 도구가 되지 못했다. 

계몽주의 이후 250년간의 서구 근대사를 훑어가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총체적 실패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근대성에 대한 문명 비판서이다. 또한 과학, 역사, 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촘촘하지만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보니 빠르게 읽히는 책도 아니고, 어렵게 읽어냈다 해도 몇 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책이다. (다행히 독자들은 책의 서문과 8장, 책의 내용을 친절히 요약하고 있는 옮긴이 해설을 통해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문명의 근본적 문제를 선언적으로 진단하기보다 그 역사적 과정을 짚어가며 찬찬히 풀어 설명하는 방식이어서 느린 속도로 따라 읽어가다 보면 저자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자는 생태적 문제들 배후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바로 그 심층에서부터 가치관와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고는 진정한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연을 파편화된 상품들의 창고”로 생각하게 만들고, 오직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경제적 생산성만을 공동선의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근대적 인간관은 윤리적 규범을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사적 영역으로 제한하고 사유재산과 소유권을 신성시하는 방식으로 이 자본주의 경제를 떠받쳐왔다. 저자는 그간 절대적 기준으로 여겨져 왔던 근대적 인간관과 윤리 전체에 대한 문화적 혁신을 통해서 시장 경제는 ‘강등’되고 ‘길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시민운동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천착하는 근대적 인간관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환경운동은 시민운동과 차별화되어야 하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 시민운동들이 동의하거나 강조해온 근대적 전제들 그 자체에 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비유를 빌어 “남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북쪽을 걷는 사람들”이 시민운동에 해당된다면, 환경운동은 잘못된 기차의 방향 자체를 돌리려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환경운동은 시민운동이 전제하는 개인주의적 인권개념과 인간예외주의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상호연결되고 상호의존하는 연결망의 일부로서 인간의 위치를 새로 자리매김해야 할 지난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은 뼈아프지만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지적이었다. 정말로 환경운동은 특정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자연의 적절한 이용과 남용을 구분하는 적절한 언어와 기준부터 제시해야 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혹자는 저자가 대학이라는 상아탑에서 한가롭게 이론을 논하는 학자니까 가능한 관점이라고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이다. ‘감사의 글’에 언급되듯 저자는 ‘샴페인의 프레리강 연대’의 일원으로 자신이 사는 지역의 환경 보존 문제로 구체적인 현장에 개입해온 경험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저자의 비판은 자기성찰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연이나 하며 돌아다니는 녹색지식인들이 개혁의 중심 동력이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더 엄격한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시사항이 아니라, 더 큰 덕과 통찰을 보여주라는 요청, 잘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존경받을 만한 조상이 되라는 요청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286) 밑줄을 그어놓고 음미하게 되는 구절이다. 

글을 정리하다 밤 늦어서야 텔레그램에 접속하니 미확인 메시지가 백 개 넘도록 쌓여 있다.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환경운동 그룹의 단톡방에 활동 보고와 인증사진들이 반나절 만에 그 만큼 모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글로벌 기후 행동의 날이었다. 어려운 책을 붙들고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느라 어떤 활동의 흔적도 남길 수 없었지만. 이날의 의미에 더없이 어울리는 일을 나 나름 하면서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단락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데 앞으로 250년, 어쩌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과연 이렇게 긴 시간이 남아 있을까? 물론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저자가 보여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의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얼마인지 모르는 그 시간마저 허비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정혜진 이화여대·기독교학

이화여대에서 국어국문학과 기독교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화여대 강사이며, 저서로는 『한국적 작은 교회론』(공저), 역서로는 『여성, 존엄을 외치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저항』, 『여성들을 위한 성서 주석』(구/신약편, 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