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민족주의의 위험한 진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2021-09-13     이현건 기자

■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 임지현 저 | 휴머니스트 | 640쪽

 

우리가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된 지 올해로 76년째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시간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식민 지배의 희생자로 굳게 믿어왔다. 그래서 아시아의 전쟁과 학살에 책임이 있는 일본의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것을 볼 때마다 크게 분노한다. 하지만 참배 같이 노골적인 행위보다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히로시마 원폭의 기억을 통해 ‘피해자’ 일본이 부각될 때다. 히로시마가 반핵평화운동의 상징이 될 때, 전쟁의 책임이 흐려지고 가해자의 희생자성만을 강화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은 우리가 일본의 후안무치함을 비판할 자격을 갖춘 ‘정당한’ 희생자라고 믿을 때 나타난다. 저마다 자기 민족이 정당한 희생자라고 강변하는 시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21세기 기억 전쟁의 위험하고도 유력한 이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저자 임지현 교수는 이 책을 통해 21세기 기억 전쟁의 복잡한 풍경을 선명하게 포착한다. 수백만의 유대인이 희생된 홀로코스트 앞에서도 자신들의 고통만을 강변하는 독일과 폴란드의 우익,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영원히 세습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주의적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의 명예를 더럽히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파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얼마나 강력하게 지구적 기억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희생과 고통의 기억을 줄 세움으로써 누가 더 ‘우월한’ 희생자인지를 다투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자신의 과거를 정확하게 반성하지 못하게 만들고 민족 사이의 갈등만을 부추긴다. 고통과 희생을 혐오와 적대가 아니라 이해와 연대를 위한 마중물로 삼는 기억 연구가 절실한 이유다. 

저자는 지구적 기억 공간을 떠돌면서 인문사회과학의 설득력은 연구자 자신의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삶의 경험에 뿌리박은 고유한 문제의식과 그 경험을 추상화할 수 있는 이론적 힘에 있음을 깨달았다. ‘서양’이 이론을 제시하고 ‘동양’은 경험자료를 제공하는 불평등한 학문적 분업 체제가 아닌, 지구적 근대의 주변부인 동유럽과 동아시아의 경험에 천착한 독자 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발간은 큰 의미가 있다. 

오랫동안 폴란드와 독일 등을 넘나들며 연구해온 임지현 교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장으로 먼저 폴란드의 기억 전쟁을 살펴본다. 폴란드와 한국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희생자라는 위치를 부각한다는 점에서 21세기 민족주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전사자를 ‘숭고한 희생자’로 숭상하는 국민국가는 민족주의라는 시민종교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여기에 고통 받은 희생자들의 기억이 덧붙어 도덕적 권위의 근거가 ‘영웅’에서 ‘희생자’로 바뀜으로써, 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민족주의의 모습은 훨씬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탈냉전을 맞아 기억도 국경을 넘나들며 지구화 시대에 들어선다. 특히 2000년은 지구적 기억 문화의 ‘0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해다. 2000년 1월에 열린 ‘홀로코스트에 대한 스톡홀름 국제포럼’은 홀로코스트의 교육과 기억 보존을 의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여성 국제전범재판소’가 도쿄에서 열렸다. ‘위안부’ 문제에 제국주의와 성적 폭력이 동시에 얽혀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국제전범재판은 일본군 ‘위안부’가 결코 한국만의 문제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기억활동가들이 ‘위안부’ 희생자들과 연대하고,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생존자와 ‘위안부’ 희생자의 증언을 함께 전시한 기획이 성사되는 것은 고통과 희생의 기억이 국경을 넘나들며 갈등과 연대의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기억의 연대가 언제나 매끄럽게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희생자로 나선 이들이 자기 나라의 가해자성을 마주할 때, 기억의 지구화는 기억의 국민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억의 지구화와 더불어 두드러지는 현상은 기억의 병치다. 나란히 선 기억은 서로를 참조하면서 희생의 고통을 부각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희생자와 더욱 쉽게 동일시하도록 만든다. 나가사키가 세계평화를 위해 제물로 바쳐졌다는 서사는 종교적으로 강렬한 만큼 정치적으로 크게 문제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또 있다. 바로 부정론이다. 특히 실증주의적 부정론은 ‘물적 증거’를 강조함으로써 생존자의 증언을 무력화하고 희생의 기억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에 묶어두려 한다. 희생자의 개인적인 기억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자양분인 동시에, 진영의 유불리에 따라 억압되고 배제되는 것이다. 이때 기억 활동가에게 필요한 작업은 얄팍한 ‘팩트’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생존자의 ‘깊은 기억’을 끌어내고 이를 세심하게 서사화하는 것이다.

저자는 진정한 기억의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희생의 경험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고 서로 다른 희생의 기억을 줄 세워 국가와 민족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데 그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국가 간의 장벽을 더욱 높여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적대만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21세기 민족주의를 포착하는 가장 적확한 개념인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확하게 통찰함으로써 지구적 기억의 윤리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