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서사, 운명과 대면하는 힘

[리베르타스]

2021-08-23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얼마 전에 『오이디푸스 왕』을 다시 읽었다. 할 일이 산더미였는데도 그저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일 년에 한 번쯤은 이 책을 들추는 것 같다. 유난히 루틴처럼 손이 가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도 그 책!
   ‘어,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맨 처음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을 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고백하건대 별 감흥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흥을 거부한 것인지도. 아주 오래 전, 대학시험에서 떨어진 후 마음을 가다듬느라 집어든 책이 하필이면 이 책이었으므로. 나름 절망에 빠져있던 내가 집어든 책이 하필이면, 비극 작품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오이디푸스 왕』이라니. 
   그때 면역주사를 제대로 맞은 것일까. 이후, 슬픔과 절망의 더께가 쌓일 때마다 한 겹씩 헤아려나가는 힘이 나도 모르게 더러 불쑥 생기기도 하는 것이. 이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세상에, 삶에서 비극의 정조를 이토록 절절하게 말해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하는. 그래서 책으로 인연 맺는 사람에게 『오이디푸스 왕』을 어김없이 권하게 되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비극 경연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상연되던 작품을 ‘비극’이라 불렀다 한다.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비극이 아닌. 이때 기존의 신화나 전설 등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작가가 어떻게 구현해내느냐 하는 것이 비극 경연대회의 관건이었다 한다. 여기서 이야기를 버무리는 작가들은 굉장히 난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는 터라, 두루 알려진 이야기를 가지고 ‘어떻게’ 흥미 있게 전달하느냐가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포클레스는 굉장히 탁월했다. 『오이디푸스 왕』을 내용과 형식과 의미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너무나도 멋지게 재창조해냈기에. 무엇보다 내용과 형식과 의미를 구분하지 않고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시켰기에. 

   그래도, 먼저, 내용적인 부분에서 보면, 『오이디푸스 왕』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존재에 대한 질문을 안고 삶의 의미망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를 축으로 펼쳐진다. “테베의 왕가에 자식을 내면 부모는 죽는다.”는 신탁을 받은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 왕은 세상에 나온 지 사흘밖에 안 되는 자식을 내다버리라 한다. 원령이 되어 다시 찾아올까봐 쇠꼬챙이를 발에 꿰어서 버리는데(여기서 ‘부은 발’이라는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생긴다), 그 아이는 이웃나라인 코린토스의 자식 없는 왕 폴리보스에게 넘겨져서 왕자로 잘 자란다. 어느 날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탁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을 접하고 코린토스를 떠난다. 코린토스의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나서던 중 세거리에서 노인을 만나 언쟁을 벌이다 그만 그를 죽이고 마는데, 그 노인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버지 라이오스 왕.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저주로 물들인 스핑크스가 낸 문제들을 풀어 왕이 되고, 그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과 두 딸을 낳는다. 이후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의 비밀을 ‘굳이’ ‘스스로’ ‘마침내’ 알아내고, 두 눈을 이오카스테의 금 브로치로 찌른 후 나라 밖으로 길을 나서는 것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간결하면서도 복잡한 이야기. 한 단락으로 줄거리가 요약되는, 그러나 인간 삶이 끝날 때까지 뇌리를 떠나지 않을 이야기.
 

   다음으로, 형식적인 부분을 보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하루’라는 시간 동안 모든 일들을 죄다 풀어낸다. 테베의 궁전 앞 제단 주위에 모여 탄원하는 백성들 앞에 등장한 오이디푸스의 대사로 이 작품은 시작된다(“내 아들들이여, 오래된 카드모스의 새로 태어난 자손들이여. …… 그대들은 무엇이 두려워, 아니면 무엇을 바라고 여기 앉아 있는 것이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잘못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그가 잘못인 줄 모르고 행한 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사건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지 않고 피드백 형식으로 펼쳐진다.
   도입부와 결말을 제외하면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오이디푸스 왕』은 이른바 수사극 형태를 띤다. ‘누가 라이오스 왕을 죽였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주체가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 나는 이러한 사실에 무척 끌렸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이 『오이디푸스 왕』을 그렇고 그런 고전의 반열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범인이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이 작품이 채 절반에 이르기도 전에 미리 제시된다는 점이다. 이에 오이디푸스의 투영한 대사들이 범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차근차근 진실에 다가간다. 이때 진실에 다다르는 실마리를 단계적으로 엮어나가는 대사들이 너무나도 정교하고 치밀해서 감탄을 멈추기가 쉽지 않다. 특히, 범인이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는 무대인,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가 벌이는 대화의 장면에 이르면, 신적인 권위와 이성적인 위력이 맞부딪치면서 번쩍이는 감동의 향연 한가운데서 가슴이 먹먹하기까지 하다. 특히 이 부분은 소리 내어 몇 차례 거듭 읽기를 권한다. 그리스극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제일 중요한 장면은 한가운데 나온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상의 놀랍도록 경이로운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특히 놀라운 사실은 필연성에 의해서 사건들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너무나도 내밀하게 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이디푸스 왕』을 운명극이라 말한다. 물론 운명극이라 여겨질 만한 요소들을 『오이디푸스 왕』이 듬뿍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탁의 예언이 사실로 드러나는 대목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을 운명극이라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주어진 운명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것보다는 그 운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맞닥뜨려 나가는가를 『오이디푸스 왕』은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굳이 ‘진실’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그 전에 코린토스의 왕자로 무심하게 잘 살아도 되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태생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파국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의 삶에 깃든 서사들을 허투루 바람결에 실어 보내지는 않았다. 운명을 뛰어넘을 수는 없으나 그 운명과 주체적으로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서사를 우뚝 세운 오이디푸스! 이러한 오이디푸스가 2021년 이 여름에도 여전히 살아 있어 『오이디수프 왕』은 단연코 ‘그레이트 북!’

   마지막으로 의미의 측면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보자.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을 세상에 낸 시기가 인류 최초로 맞이한 계몽주의 시대이고 또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제가 가능한 때였던 만큼, ‘인간이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합리적인 인간의 추락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도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두루 알려진 대로 문학작품은 어느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미를 한 줄의 주제로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레 『오이디푸스 왕』 작품이 제기하는 세 가지 질문과 오롯이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질문은 ‘왕을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내가 그 살인자인가’라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별적인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승화되는 것이어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숙연함마저 환기한다. 

 

   앞서 이 작품을 인간의 이성도 한계가 있지만 운명극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 했다. 자기 의지로 왔다는 코린토스의 사자도 그렇고, 그 누구보다 “당신을 파멸시킨 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아폴론 신이지만, 내 눈을 찌른 것은 나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오이디푸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른 행위는 다름 아닌 주체성이다.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진실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라고 판단하고 또 그리 실행한 오이디푸스는 그 누구보다 자율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물론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그 운명을 막무가내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을 내밀하게 성찰한 인물이 바로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진실을 규명해나가는 과정들은 고통스럽고 처절하기 짝이 없었지만, 진실을 향한 그의 고귀한 의지를 보노라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새삼 다시 헤아리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구사한 이래 더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을 직접 읽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되도록 읽는 것이 좋다. 우리는 ‘무엇을’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어떻게’ 구현해내고 있는 지를 보려고 책을 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우리 삶과 만나게 하려고 책을 읽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구사한 이래 더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을 직접 읽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되도록 읽는 것이 좋다. 우리는 ‘무엇을’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어떻게’ 구현해내고 있는 지를 보려고 책을 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우리 삶과 만나게 하려고 책을 읽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희곡 작품 속 유영하는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다. 소설만큼 친절한 설명이 없어서 낯설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에게 상상력을 최대한 허용하는 큰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소설로는 엄두도 못 낼, 작품 속 이야기를 맘껏 연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부디 이 가슴 설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여기서 오늘날 뮤지컬에 해당하는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비극 작품이 연극 대본이고 따라서 대화로 이뤄졌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포클레스가 구현한 비극은 대화와 합창이 번갈아 나오는, 일종의 뮤지컬이라는 사실을 환기하자. 인간 존재의 문제를 온몸으로 제기하고 체감하고 싶다면, 대사와 합창으로 어우러진 한 편의 뮤지컬인 『오이디푸스 왕』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하나 더! 희곡 작품은 ‘무조건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낭송의 묘미는 희곡 작품에서 제대로 발휘되므로.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도 꼭 소리 내어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오이디푸스도 되고 테이레시아스도 되고 라이오스 왕도 되고 이오카스테도 되어서, 삶의 이랑과 고랑에 한껏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안티고네의 손을 잡고 나라 밖을 나서는 오이디푸스의 마음자리를 헤아리면 좋겠다. 찬란한 비극으로 찬란한 삶을 만났으면 좋겠다, 여전히 어수선한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문선영 서평위원/동아대·국문학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시인·문학비평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현대시)을 전공하였다. 1990년 『문학예술』 제1회 신인상 시 부문 당선, 1991년 『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익숙한 소리』(시집), 『현대시와 문화의식』, 『한국전쟁과 시』 등이 있으며, 그 외 공저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 『한국 현대문학의 성과 매춘』, 『몸의 역사와 문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