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영위한 한글 사용의 역사를 탐구하다

2021-08-01     백두현 경북대학교·국어국문학

■ 책을 말하다_ 『한글생활사 연구』 (백두현 지음, 역락, 568쪽, 2021.06)

 

한글생활사란 무엇인가?

한글생활사는 한국인의 어문 생활에서 한글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고, 그것이 한국문화의 형성에 어떻게 작용했으며, 한글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밝히려는 학문이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창제하여 세상에 반포(1446년)한 이후 우리 민족은 이 문자를 어떻게 사용해 왔을까?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했다. 이것이 향찰, 이두, 구결이다. 이 셋을 묶어 차자(借字) 표기라 부른다. 한문에 익숙한 양반층 지식인은 차자 표기 방식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글을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까막눈이었다.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문맹(文盲)들! 이들의 눈을 뜨게 한 것이 훈민정음이었다. 까막눈 문맹으로 새 문자를 가장 먼저 배운 이는 궁중의 하층민인 궁녀들이었다. 젊은 궁녀들은 한글을 배워 궁궐을 지키는 무관에게 연모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글은 궁궐의 높은 담벽을 넘어 서울 도성에 사는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종로 시전 상인으로 하층민에 속한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기도 했다. 도자기를 빚어내는 도공들이 한글을 배워 본인이 만든 도자기 바닥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다. 15세기 후기에서 16세기 초기 사이에 빚은 분청자 대접 조각에 ‘라랴러려’ 음절자 행렬이 쓰인 유물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한글은 왕실 귀족과 양반층 남녀 그리고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다. 

한글이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역사적 전개 양상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한글생활사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 한자의 음과 훈으로 우리말을 표기한 방법까지 넣어서 한국인의 글 생활 전반을 연구하는 분야는 한국 문자생활사이다. 한글생활사는 한글 창제 이후의 한글 사용에 국한하여 한국인의 문자 생활사를 논한다. 나의 저술, 『한글생활사 연구』는 문자로서의 한글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탐구한 책이다. 

왜 한글생활사를 말하려 하는가?

언어 내적 연구에 집중해 온 그동안의 국어사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되, 한글 사용 주체와 사용 목적 등 현실의 삶과 관련지어 한글 자료를 보려는 것이 한글생활사이다. 국어사 연구는 한글 문헌(그것도 간행본)을 주 대상으로 삼아 왔으나 한글생활사의 연구 대상은 더 다양하다. 한글생활사는 필사본 한글 문헌을 중시하며, 종이에 쓴 문헌뿐 아니라 돌, 금속, 도자기, 목기(木器) 등 다양한 소재에 쓰인 한글 자료를 모두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한글 문헌이 한글생활사 연구의 중심 자리에 놓이지만 종이 자료 이외의 것도 모두 포함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가 쓰는 용어는 ‘한글문화유산’이며, 이것이 한글생활사의 연구 대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옛 한글 자료를 들여다보면 훨씬 다양하고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캐낼 수 있다. 

 

 한글 편지는 한글생활사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이자 역사적 자료이다. 조선시대의 한글 편지는 대부분 양반층 남녀가 주고받았으나 20세기 근대 교육이 시행되면서 모든 계층에게 한글 편지 쓰기가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한글 편지 쓰는 방식을 설명한 편지투 책이 많이 판매되었다. 이 사진은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서울의 덕흥서림에서 신활자(납활자)로 간행한 책의 표지이다.

『한글생활사 연구』의 내용 구성과 요지는?

『한글생활사 연구』는 저자가 그동안 실천해 온 한글생활사 연구를 결집한 것으로 전체 4개 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제3부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기에 소개한다.

『한글생활사 연구』의 제3부 제1장은 사회 구성원 간 의사소통 매체로서 한글의 사회적 활용 양상을 논하였다. 언간은 임금과 왕실가 사람들, 양반 사대부가, 양반과 노복, 여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다양한 신분을 가진 개인 간의 소통 매체로 신분을 가로질러 오간 것임을 실물 자료와 사료 기록을 통해 밝혔다. 한글이 공적 차원의 소통 매체로 사용된 여러 사례를 검토했다. 임금이 백성에게 내린 유서와 윤음, 왕후와 대비가 조정 대신에게 내린 언서, 외교상의 비밀스러운 정보 교환, 이서(吏胥)가 관아의 공무를 수행하면서 쓴 한글 문서와 언간 등의 예를 들고 그 의미를 논하였다. 

소통 매체로 기능한 한글의 가장 특이한 사례는 백성이 주체가 되어 관아에 낸 언문 진정서, 관리의 비리를 고발하는 투서와 언문 벽서 등이다. 역모나 비밀스러운 모의(謀議)에 관련된 언문 익명서 사건들(중종대 김세필 사건, 명종대 울산군수 고경명 사건, 명종대 전성정 모함 사건, 광해군대 서양갑 사건, 허균 관련 언문 익명서 사건 등등)을 분석하고 그 경위를 밝혔다. 언문이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양반들은 가장 두려워하였고, 한글을 하층민에게 가르치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음을 논했다. 한글에 의한 이 같은 상향적 소통은 한글의 사회적 기능이 가장 적극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제3부 제2장에서는 인민 통치를 위해 국가가 한글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교화서 간행·윤음언해의 반포·언해본 의약서 편찬 등의 자료를 근거로 그 실상과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 제3부 제3장에서는 언문(=한글) 관련 법률 전반을 논하였다. 세종과 세조가 관리 선발시험에 언문을 부과한 법률을 검토하고, 숙종 1년에 시행한 사채(私債) 문서 언문 사용 금지법의 의미와 이것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사례를 들어 논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국문을 쓰도록 한 공문식 법령의 제정과,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글 관련 법률의 변천과 관련지어 논하였다. 

이와 같이 『한글생활사 연구』의 제3부는 소통 문자로서의 한글이 갖는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논구한 것이다. 이 논구를 통해 얻어낸 저자의 통찰을, 사채문서 언문금지법의 의미·소통 문자로서 한글이 가진 계층적 포괄성과 목적의 다양성·소통 경로의 전환과 현대적 의미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했다. 이 중의 세 번째 것만 여기에서 소개한다. 과거에 작성된 한글 편지와 한글 고문서는 작성된 과거 시점에서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의사소통 매체였지만, 오늘날의 한글 편지는 과거의 사람과 현재의 사람이 대화하는 소통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소통 경로의 전환’(Shift of Communication Channel)이라고 명명했다. 이천 리 제주 바닷가에서 아내를 염려하는 추사 김정희의 안타까움은 그가 쓴 편지를 통해 지금의 ‘내’가 공감할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이 쓴 한글 편지를 통해 오늘날의 우리가 그들의 마음과 소통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한글 편지는 과거의 발신자·수신자 간 소통 매체였으나, 현대인에게는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소통의 매체가 되어 있다. 저자의 이러한 통찰은 명고전(名古典)이 아닌 보통의 문헌 자료가 갖는 현대적 의미를 새롭게 본 것이라 평가받고 있다.

한글생활사 연구의 의의

언어는 사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사용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따라서 언어생활 연구는 언어 사용자와 사용 환경을 중시해야 한다. 한글생활사 연구는 한글 문헌의 생산자와 향유자 그리고 언어 및 사용자가 처한 사회적 요소를 언어 요소와 관련지어 고찰함으로써 한국 어문 연구의 지평을 넓히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연구는 한민족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의 핵심을 드러내는 길이며, 미래 한국인의 언어·문자생활을 위한 방향 모색과 정책 수립에 필요한 기초가 된다. 지금까지 ‘한글생활사’를 서명으로 단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이 체제와 내용이 한글생활사의 전모를 다 갖춘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이 분야의 연구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 본다.


백두현 경북대학교·국어국문학

경북대학교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남 문헌어의 음운사 연구』, 『석독구결의 문자체계와 기능』, 『현풍곽씨언간주해』, 『음식디미방주해』, 『한글문헌학』, 『현장 방언과 문헌 방언 연구』, 『국어음운사와 어휘사 연구』, 『한글생활사 연구』 등의 학술서를 냈다. 연구 성과를 교양시민과 공유하기 위해 『경상도 사투리의 말맛』, 『한글편지로 본 조선시대 선비의 삶』, 『한글편지에 담긴 사대부가 부부의 삶』, 『한국어는 나의 힘』(공저), 『한국어에 힘 더하기』 등의 교양서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