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인식 없는 열반은 맹목이며 열반 없는 바른 인식은 공허하다

2021-07-25     이현건 기자

■ 인식론평석: 지각론 | 다르마키르티 지음 | 권서용 옮김 | 그린비 | 608쪽

 

모든 인식론은 지각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지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인식론을 전개해 나간다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철학은 추상을 설명하는 것이지 구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는 기술될 뿐이다. 신이나 부처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인식론은 지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각을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인간의 사변적 경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책은 인도의 불교논리학자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의 핵심인 지각론 539게송 원전을 번역한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들 전망한다. 그 전망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물음을 근원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광의로 말하면 형이상학이며 협의로 말하면 인식론이다. 인류사에서 체계로서의 인식론은 인도유럽어에 근거한 그리스적 사유와 인도적 사유에만 존재한다. 그리스적 사유를 근간으로 서구의 인식론을 완성한 사상가가 칸트라면, 인도적 사유를 토대로 인도불교의 인식론을 완성한 사상가는 다르마키르티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위대함은 인식의 본질을 대상인식이 아니라 자기인식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 18세기의 일이다. 하지만 디그나가로부터 시작되어 다르마키르티에 의해 완성된 인도불교 인식론은 처음부터 인식의 본질을 자기인식이라고 직감했다. 7세기의 사건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 그것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며 각자(覺者: 진리를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다. 칸트와 다르마키르티는 공히 성인과 각자를 지향했다. 이런 측면에서 칸트를 철학자라는 좁은 범주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성적인 철학자이자 청정한 도덕인이며 성스러운 종교인이다. 마찬가지로 다르마키르티도 불교의 스님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되어선 안 된다. 그는 성스러운 종교인이자 합리적인 철학자이며 청정한 도덕인이다.

합리적 철학, 청정한 도덕, 성스러운 종교는 모두 바른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바른 인식을 ‘프라마나’라 한다. 프라마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직접적 인식으로서의 지각이며 또 하나는 간접적 인식으로서의 추론이다. 다르마키르티의 주저인 『인식론평석』(프라마나바르티카)은 모두 1,450개의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송은 시이다. 김소월의 시, 두보의 시, 프루스트의 시처럼 다르마키르티는 시로써 자신의 인식에 관한 사변을 논문으로 쓴 것이다. 시로 쓴 논문인 『인식론평석』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추리론, 제2장 종교론, 제3장 지각론, 제4장 변증론이다. 이 가운데 지각론은 모두 539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는 종교이자 철학이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며 철학의 최종적 지향은 바른 인식이다. 그래서 불교는 바른 인식을 근거로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다. 즉 바른 인식 없는 열반은 맹목이며 열반 없는 바른 인식은 공허하다. 불교가 맹목과 공허 사이에 중(中)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열반이라는 하나의 수레바퀴와 바른 인식이라는 또 하나의 수레바퀴로 굴러가는 수레의 철학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니르바나와 프라마나의 관계를 다시 칸트식으로 말하면 니르바나 없는 프라마나는 공허하며 프라마나 없는 니르바나는 맹목이다. 따라서 불교가 중도의 가르침일 수 있는 것은, 아울러 종교이면서 철학이며 철학이면서 종교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니르바나와 프라마나라는 두 기둥에 의해 축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는 니르바나의 철학이자 프라마나의 종교라 할 수 있다. 다르마키르티의 주저인 『프라마나바르티카』를 우리말로 역안(譯案)한 이 책은 프라마나라는 합리적 인식을 통해서 깨달음, 즉 부처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철학서이자 종교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