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페미니즘 사이의 대립을 초월하다

2021-04-04     김한나 기자

■ 페미니즘과 정신분석: 딸의 유혹 | 제인 갤럽 지음 | 심하은·채세진 옮김 | 꿈꾼문고 | 284쪽

이 책은 페미니즘 이론과 정신분석의 관계를 연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정신분석, 특히 라캉의 이론과 그와 연관된 다양한 페미니즘 텍스트들을 특유의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로써 아주 세밀하게 분석한다. 저자의 목적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사이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차이와 갈등의 해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차이들 사이의 접촉,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각각의 한계에 포함되지 않는 무언가에 서로를 개방하는 접촉,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는 교류와 소통을 의미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정신분석적이면서 페미니즘적이기를 표방한다.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영국의 페미니스트 줄리엣 미첼의 『정신분석과 페미니즘』(1974)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미첼의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은 프로이트를 여성의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는 영어권, 특히 미국 페미니즘의 무지와 오해와 왜곡을 가혹하게 비판한다. 미첼은 프로이트를 제대로 읽고 페미니즘에 정신분석을 부가함으로써 결점을 보완한, 더 강하고 더 풍성하고 더 지혜롭고 더 나은 페미니즘을 만들고자 했다. 저자는 미첼의 이러한 시도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을 시작한다. 즉, 1장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은 미첼 텍스트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갤럽의 ‘자세히 읽기’이다.

그래서 『몸 페미니즘을 향해』의 저자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비유되는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관계에서, 프로이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미첼을 충실한 딸로, 그러한 옹호의 한계를 발견하고 극복하려 하는 갤럽을 반항하는 딸로 나누기도 한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프로이트와(결국에는 라캉과) 뤼스 이리가레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저자는 갤럽은 이리가레의 『반사경』 가운데 프로이트의 「여성성」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자세히 읽기’라고 할 수 있는 「대칭이라는 오래된 꿈의 맹점」을 읽으면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둘 사이의 유혹에 대해 면밀히 살펴본다(이 책의 부제는 ‘딸의 유혹’이고, 이 책의 중심이며 가장 긴 5장의 제목은 ‘아버지의 유혹’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가 프로이트의 남근중심주의, 시각중심주의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여성은 (남성과 달리) 정당한 표상을 가질 수 없고, (남성과 달리) 결핍으로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성기의 문제는 프로이트와 라캉 사이에 아주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라캉주의는 그 차이에 근거해 페미니즘의 비난을 반박한다.

하지만 저자 갤럽은 남근과 음경을 대립으로 양극화하려는 시도는 “언어에 대한 매우 순진한, 비라캉주의적인 관점”이라고 지적하며, 결과적으로 라캉주의자들 또한 남근과 음경의 혼동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 갤럽은 “페미니즘이 남근중심적 세계를 바꾸려 한다면 남근중심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정신분석 ‘자세히 읽기’는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한 갤럽의 연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원서

반항하는 딸 갤럽은 라캉과 이리가레를 통해 프로이트와 충실한 딸 미첼을 비판하고, 계속해서 이리가레를 통해 라캉주의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갤럽은 이리가레를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관계라는 문제의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갤럽은 이리가레와 마찬가지로 답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갤럽은 이 책의 모든 장에서 두 이론 또는 두 이론가 또는 두 텍스트를 양편에 놓고 ‘자세히’ 읽지만, 결코 확실하게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는다.

갤럽은 시종일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양립 가능성, 바꿔 말해 동질성과 이질성, 고체성과 유체성의 상호 공존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것은, 라캉주의 용어를 빌리면, ‘아버지의 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갤럽은 라캉주의를 비판하는 이리가레와 옹호하는 르무안-루치오니를, 남근적 어머니의 자리를 피하려는 이리가레와 일부러 그 자리를 차지하는 쥘리아 크리스테바를, 엘렌 식수의 상상계와 카트린 클레망의 상징계를 나란히 놓고 읽으면서, 남근중심적 이론, 남근중심적 담론을 다각적으로 뒤흔든다.

갤럽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딸)은 정신분석(아버지)에 대한 저항을 버리도록 유혹당한다. 아버지는 냉정한 자제를 버리고 욕망을 드러내도록 유혹당한다. 하지만 나는 그 둘이 더 이상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유혹이 그 둘을 아버지와 딸의 가족적 역할에서 빼내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 둘의 유혹은 가족이라는 폐쇄 집단에 이질성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만남인 『딸의 유혹』은 아버지의 남근을 해체함으로써 가족적 사고의 함정을 피해 우리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훨씬 더 복잡한 권력관계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갤럽이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관계를 연구하는 이 책의 마지막을 ‘다른 양성애’에 대한 언급으로 맺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여성 저자들[식수와 클레망]은 ‘다른 양성애’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상계에서의 차이의 환상적 해결도, 상징계에서의 통일성 결여의 육체 없는, 기쁨 없는 가정도 아닌, 다른 양성애, 상상계와 상징계 양쪽 모두를, 이론과 육체 양쪽 모두를 추구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양성애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