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변혁의 중국과 ‘더 좋은 민주주의’의 길

■ 나의 책, 나의 테제_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 1919, 1949, 1989』 (백영서 지음, 창비, 428쪽, 2021.01)

2021-02-28     백영서 연세대 명예교수·사학

■ 나의 책, 나의 테제_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 가지 사건: 1919, 1949, 1989』 (백영서 지음, 창비, 428쪽, 2021.01) 

역사학자의 가장 큰 보람은 개설서를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연구자로서 훈련을 받았던 터라 언젠가는 중국현대사 개설서를 내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이 책은 그런 소망의 온전한 실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변형된 형태로나마 일정 정도 그것을 구현하는 셈이다.

애초 이 책을 구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2018년 1월 ‘네이버 열린연단’의 강연이었다. 다가올 2019년을 의식해 세 개의 사건 곧 1919·1949·1989년에 일어난 큰 사건을 중심으로 중국현대사를 개관한 당시 강연을 들은 주위 분들이 아예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보라고 권유했다. 마침 그해 8월 정년퇴직으로 집필할 여유가 생긴 데다가 ‘촛불혁명’의 경험과 3·1운동 100주년이란 계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볼 기회를 가지면서, 중국 현대사도 ‘현대중국’도 ‘혁명중국’도 아닌 ‘100년의 변혁’으로 해석해 보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저자가 대략 한 세대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발생한 세 사건을 선택한 것은 2019년에 제각기 100주년, 70주년, 30주년이라는 기념 해를 맞았다는 우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박사학위 논문 작성 때부터 공론장으로서의 텐안먼(天安門)의 상징성에 관심을 가졌었기에 텐안먼을 축으로 100년의 변혁의 세 분수령을 재현하고 싶어서였다. 책 전체에 흐르는 주선율을 ‘민(民)의 결집과 자치의 경험’으로 잡고, 각 부의 변주로서 변혁주체의 궤적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1919년 5·4운동을 ‘신청년의 시대’(제1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당과 인민의 시대’(제2부), 1989년 천안문사건을 ‘군중자치의 순간’(제3부)으로 파악하고 각각을 집중적으로 서술하였다. 프롤로그에서는 저자의 문제의식, 에필로그에서는 “중국, 어디로 갈 것인가”를 다뤘다. 여기에 더해 세 사건 간의 간격을 메우는 서사에도 내 딴에는  꽤 신경을 썼다. 개설서에는 물론 못 미치지만, 현대 중국 100년의 역사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다.  

상해입성

물론 이렇게 세 개의 사건을 선택한 기준에 대해 갸우뚱하는 반응도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왜 꼭 1989년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고 본다. 사실 중국 현대사에서는 네 개 혁명 곧 신해혁명-국민혁명-공산혁명-문화대혁명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고, 아니면 개혁개방을 ‘제2의 혁명’이나 ‘조용한 혁명’으로 부르는 시각도 있다. 그러니 왜 1989년을 대신해 문화대혁명이나 개혁개방을 다루지 않았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1989년을 중시하는 까닭은 톈안먼사건이 중국현대사를 공부하는 동시대의 소장 연구자에게 아포리아로서 다가왔던 탓도 있지만, 그해가 체제전환이라는 과도기적 상황을 매우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문혁의 단절이자 계승으로, 그리고 개혁개방의 빛과 어둠으로 파악함으로써 두 혁명적 사건(문혁과 개혁개방)을 아우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식은 세 가지 사건을 통해서 ‘민(民)의 자치와 결집’의 역사적 경험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서 100년의 중국현대사에서 시도되었던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동시 수행이라는) ‘이중과제’ 실현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화의 실질적 확충’을 위한 각 세대의 역사적 고투의 궤적을 추적하고, 이를 ‘이중과제론’의 방식에 입각한 ‘헌정 의제’ 실현의 역사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헌정 의제는 명·청대 이래의 장기 지속된 과제(Philip A. Kuhn)를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정치참여의 확대와 더불어 국가의 권한 및 정통성 제고라는 두 가지 요구를 한꺼번에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과정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세 개의 부를 두고, 각 부의 앞에서는 각 사건의 개관을, 뒤에서는 주요 쟁점의 심화읽기 및 (일국사를 넘어) 동아시아사로의 공간적 확대를 꾀했다. 말하자면 개관-심화-확장의 틀을 염두에 두었다. 이로써 교양적 읽을거리를 원하는 독자와 다소 전문적인 지식을 원하는 독자 모두를 배려한 셈인데,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반응을 기다려볼 따름이다.

천안문

다행히 출간 직후 일부 일간지에서 긴 서평기사를 실어주어 일반 독자와 연결될 수 있는 다리가 놓여졌다. 그 기사를 아래에 연결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058641
https://n.news.naver.com/article/011/0003867596
https://news.v.daum.net/v/20210129050645721

또 다른 반응은 지난 2월 24일 서울대에서 열린 북 콘서트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전공의 중국 연구자 5인이 이 책의 논평자로 참석했는데 그중 유용태(서울대)교수는 이 책의 학술사적 의미를 네 가지로 간추렸다. 저자의 저술 취지를 잘 간파했기에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겨본다. 

첫째, 새로운 서사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의 중국 ‘현대(통)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중화민국 시기(1911~1949년)와 중화인민공화국 시기(1949년 이후)를 관통하는 ‘현대(통)사’는 국내외를 둘러보아도 찾기 어려운데, 이는 서로 다른 두/세 시기(개혁개방 전후가 사실상 다른 시기이니 세 시기)를 일관된 논리와 체계로 회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사회문화사를 통사의 일반적 서사 방식인 편년체가 아니라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에 가까운 방식으로 세밀한 필치로 흥미롭게 재현하였다. 

둘째, 헌정 과제 수행의 성취와 한계를 판단하는 기준은 중국 바깥의 서방에서 형성된 제도나 가치가 아니라 중국 내부, 곧 ‘5·4’에서 형성된 ‘민의 자율적 결집과 자치’가 이중과제론의 내적 긴장 속에 누적적으로 확충되는가의 여부이다(여기서 5·4는 가치의 관제 고지가 된다). 1989운동의 실패와 억압된 기억에 대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 내면의 동향까지 포착하려 애쓴 것은 바로 그 때문인 듯하다. 

셋째, ‘5·4’의 가치인 ‘새로운 민주주의’(민의 자율적 결집에 의거한 제도설계들, 예컨대 직업대표·연합정부·혼합경제 등)를 역사문제인 동시에 현실문제로 인식하는 강한 실천성과 사상성을 보여준다. 이는 1980년대에 등장한 한국의 중국현대사 연구자 1세대들이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국민)혁명사 연구에 매진했으나 그 후 거의 단절된 문제의식을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리는 의미가 있다.  

넷째, 한국의 사상자원(人乃天, 원불교)을 활용해 헌정 의제상의 공화의 재구성 필요성과 당 지도부를 넘는 ‘민’ 자신의 개인적 수양·각성과 그것이 고양된 ‘사회적 영성’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각 분야 실증연구(역사와 사회과학에서 연극과 미술까지)를 넓고 깊게 종합하여 반영한 것도 큰 미덕이다.

유 교수의 이런 평가를 비롯해 이제 막 시작된 이 책에 대한 반응이 앞으로 얼마나 더 확산돼 나갈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저자로서는 구미식 민주주의와 이른바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단순 대비하는 것을 넘어서 ‘더 좋은 민주주의’의 길을 상상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었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많든 적든)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보람이다. 


백영서 연세대 명예교수·사학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문과대학장, 국학연구원장,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현대중국학회장, 중국근현대사학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이자 세교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사회인문학의 길』,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동아시아의 귀환』, 『중국현대대학문화연구』, 『思想東亞: 韓半島視角的歷史與實踐』, 『橫觀東亞: 從核心現場重思東亞歷史』, 『共生への道と核心現場: 實踐課題としての東アジア』,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리영희 선집』(공편), 『백년의 변혁』(공편), 『내일을 읽는 한·중 관계사』(공편), 『대만을 보는 눈』(공편), 역서로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공역),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