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다

■ 저자에게 듣는다

2021-02-21     조석연 신한대·한국사

■ 저자에게 듣는다_ 『마약의 사회사: 가정상비약에서 사회악까지, 마약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조석연 지음, 현실문화연구, 312쪽, 2021.01)

문제의식

그간 한국사 분야에서 마약이라는 주제는 생소했다. 최근까지도 한국은 마약에 비교적 안전한 국가로 분류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언론을 통해 종종 마약과 관련한 사건·사고들이 보도되곤 하지만 다른 사회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약 문제는 결코 우리 사회의 주변적 사안이 아니다. 마약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회적 현안들과 깊이 연동되어왔고, 한국 사회에 드러난 마약 문제에는 각 시기의 사회상이 투영되어 있다. 때로는 정부 당국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보건 문제를 넘어 정치적인 문제로 부각되기도 했고, 또 어떤 시기에는 경제문제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마약이 어떻게 인식되고 통제되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해본다면 우리의 근현대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천연 마약을 자생적으로 재배해 사용하는 것은 민간에서 누려온 자연스러운 권리였다. 한국의 농가에서 아편을 채취해 가정상비약으로 사용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근대 국가의 탄생 이후 이러한 민간의 권리는 보건·후생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의 권한으로 재설정되었다. 국민국가 체제에서 민간이 ‘국민’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권리를 부여받게 되면서 이 같은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점차 농가의 아편 채취와 사용은 정부의 통제 대상이 되었고, 필요에 따라 양귀비를 재배하는 행위 역시 개인의 권리를 넘어선 ‘범죄’로 인식되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마약이 악마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었을까? 이 지점이 저자의 문제의식이자, 이 책의 출발이다.

한국 근현대사와 ‘마약’이라는 키워드

이 책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마약이 부정과 범죄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각 시기 마약이 사회문제화되는 양상과 정부가 마약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당대의 역사적 상황들과 연결해 살펴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전통사회 가정상비약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던 마약이 근대 국가의 출현 이후 국가 권력에 의해 어떻게 ‘악마화’되었는가에 주목해 시대별로 마약이 체제 정당성 확보와 집권 유지, 국민동원 등을 위해 어떻게 이용되었고, 그 결과 마약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는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주제의 특성상 마약과 관련한 자료들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 체계적으로 관리되거나 정리되어있지 않음에도 각 시기마다 조각나 있는 관련 자료들을 복원해 가면서 그간 한국 근현대사에서 주목받지 않던, 가려졌던 부분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는 의미가 크다.

일제강점기 아편중독 치료제, 회춘정(回春錠): 중독자는 주저 말고 즉일 복용해 심신의 멸망을 구하라 (『동아일보』 1928년 9월 16일자)

마약의 형상화 과정을 보면 근현대 한국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시대적 환경에 따라 이 문제를 사회문제로 생각하는 이유와 관점은 모두 달랐다. 전통사회에서 관용의 대상이었던 마약에 대한 인식은 해방 이후 점차 ‘반민족적’이고 ‘비국민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내재되기 시작한 마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해방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을 맞아 증폭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정부 수립 이후, 마약을 통제하는 일은 각 정권의 존립과 집권 명분 확보를 위한 도구이자 당대 처한 시대적 과제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면서 마약은 국민의 건강과 위생의 문제보다는 정치·경제·사회적 현안들과 깊이 연동되어 인식되었다. 따라서 마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국가의 주도 아래 해방 직후에는 ‘국가건설을 망치고 도둑질하는’ 도구로, 한국전쟁과 남북의 체제대결 구도 속에서는 ‘전력을 소진시키고 적을 이롭게 하는’ 도구로, 경제개발 과정에서는 ‘국가 경제를 좀먹고 사회악을 조장하는’ 도구로, 군부의 사회장악 과정에서는 ‘국가보위’와 ‘사회기강’을 위협하는 ‘반국가적이고 반사회적인’ 도구 등 ‘사회악’의 이미지로 그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마약은 ‘민족과 국민’, ‘국가와 사회’라는 공공의 키워드에 반하는 형태로, 국가안보와 경제개발과 같은 국가적 문제에 직접 대치되는 이미지로 대중의 인식 속에 각인되어갔다.

최초의 「마약법(안)」 (총무처 의정국 의사과 1955년, 국가기록원 소장)
‘혁명과업’을 방해하는 마약 (『동아일보』 1961년 12월 9일 자)

한국 사회는 개항 이후 식민지 경험과 해방, 분단과 전쟁, 급속한 경제성장, 독재와 민주화 등 급격한 사회변화를 빠른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겪어왔다. 그 때문에 마약으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들은 의료나 보건 측면의 개별 사안으로 다루어지기보다는 당대의 시대적 과제나 시급한 사회적 현안들과 연결되어왔다는 특징이 있다. 즉 마약의 사용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와 사회, 민족적 차원의 공동체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마약에 대한 경직된 관념이 형성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형성된 마약에 대한 사회적 공포심과 비판적인 인식은 현재까지 한국이 마약에 있어 비교적 안전한 국가로 평가받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엄벌주의에 기초한 정부의 마약 대책과 수직적 사회 인식의 조성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마약에 대한 공포심과 부정적 인식을 보다 강하게 각인시켰고, 자연스럽게 마약에 접근하는 대상층을 축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형성된 경직된 마약 인식은 마약중독자가 넘어야 할 사회적 경계의 벽을 더욱 높였다. 마약에 대한 악마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 나머지 마약중독자의 치료와 재활, 사회 복귀에 큰 어려움을 주었고, 관련자들을 더욱 음지로 숨어들게 하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에 형성된 마약 인식의 역사적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조석연 신한대·한국사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신한대학교 교양교육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근현대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 근현대 마약문제 연구」, 「해방 이후의 마약문제와 사회적 인식」, 「마약법 제정 이후 한국의 마약문제와 국가통제」, 「1970년대 한국의 대마초문제와 정부 대응」, 「1980년대 한국의 마약소비와 확산」, 「한국 마약문제 연구의 활용 기록과 자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