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의 선거 승리 연설

[서유경 칼럼]_ 대학직설

2020-11-15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2020년 11월 2일의 미국 대선은 두 주가 다 지나도 최종 집계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는 총유권자 2억 3,920만 명 가운데 1억 6천만 명이라는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가 투표했고, 6천 5백만 명의 우편투표를 포함하여 약 1억 명 가까운 미국인이 사전투표에 참여하는 진기록이 수립됐다. 선거 당일 수거된 투표용지 개봉 이후 주별로 일제히 진행된 1억 장의 사전투표 개봉 과정은 수일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졌다. 몇몇 주의 개봉 중지 조치로 인해 ‘민주 253 대(對) 공화 213’의 정체 상태가 며칠간 지속되다가 마침내 바이든 측이 매직넘버 270을 확보한 것은 7일 자정을 넘긴 시각, 필라델피아 주의 20석 선거인단이 민주당으로 넘어온 순간이었다.

몇 시간 뒤, 그날 저녁 8시에 바이든 캠프 소재지인 델라웨어주 웰밍턴에서 ‘제46대 대통령 당선자’가 선거 승리 연설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타전되었다. 트럼프가 아직 승복하지 않은 상황이라 분위기는 어수선했지만 8시가 가까워지자 11월의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손에손에 성조기를 흔들며 승리를 환호하는 지지자들도 연단을 중심으로 속속 포진했다.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TV 생방송을 시청하는 사람들 역시 현장의 미국인들 못지않게 숨을 죽이고 불빛이 찬란하게 밝혀진 연단을 주시하면서 그날의 주인공인 조 바이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새하얀 바지정장 차림의 갈색 얼굴이,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띠고 두 팔을 좌우로 힘차게 흔들어 공중을 가르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연단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 당선자에 앞서 연단에 서다니, 이는 전례가 없는 대단한 파격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사실 그는 바이든 승리 조의 특급 비밀병기였다. 자메이카 출신 아버지와 인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를 선택한 것은 지난 5월 조지 플로이드의 억울한 죽음이 부른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에 대한 민주당 캠프의 치밀한 선거전략이었다. 또한 특유의 무난함으로 워싱턴 정계에서 반세기 가까이 장수하면서도 만년 2인자에 머물렀던 78세 최고령 대통령 후보의 밋밋함과 노쇠함을 상쇄할 도발적이고 생기 넘치는 완벽한 보완재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3년 전 자신의 법조 커리어의 정점에서 정계로 방향을 튼 이 56세의 준비된 여성 부통령 후보는 지난 몇 달간의 유세 과정에서 가는 곳마다 유권자의 관심과 시선을 강탈하는 대단한 흡인력을 과시했다.

연단에 선 해리스가 한참을 여유롭게 둘러보다가 ‘굿 이브닝!’하고 마침내 운을 뗐다. 그런 다음, “존 루이스 의원이 생전에 ‘민주주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어떤 행동’이라고 말했지요.... 이번 선거에서는 바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투표라는 행동에 좌우되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영혼 수호 문제가 걸린 선거였고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미국의 새날을 열어주셨습니다”라고 미국 유권자 전체에게 승리의 공을 돌리면서 감사함을 전했다.

이어서 그는 미국 선조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이민자의 후손이며, 소수자인 유색 인종으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미국 시민이자 ‘여성’이고, 그날 자신이 선 그 자리는 자신에 앞서 존재했던 무수한 여성 선배들의 도전과 희생 덕분에 오른 자리이므로 자신이 진 빚을 여성 후배들에게 되갚아야 할 역사적 소명 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56년 인생을 통째로 소환했고, 1776년 독립선언 이래 미합중국이 걸어 온 244년 역사 전체의 맥락 속에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그만의 언어로 ‘재(再)의미화’를 시도했다.

카멀라의 흰색 정장은 1920년 미국의 여성 참정권 부여 100주년과 1965년 보통선거법 제정, 그리고 무엇보다 2020년 대대적으로 민주당 선거캠페인을 도운 다양한 여성 지지자 그룹들과의 연대를 상징했다. 그는 “내가 비록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최초의 여성일지언정 최후의 여성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어린 소녀들 각자가 미국이 가능성의 나라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여러분의 젠더가 무엇이든, 포부를 가지고 꿈을 꾸십시오, 확신과 함께 선도하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이전에 본 적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할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십시오. 오직 여러분이 디디는 걸음걸음마다 우리의 응원의 박수가 뒤따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라고 미래 세대를 향해 기성세대의 강한 연대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여러분이 누구에게 투표했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조 바이든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그랬듯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고 정직하며 준비된 부통령이 되려고 할 것이며, 매일 아침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을 생각하며 기상할 것입니다”라는 대국민 ‘충성서약’으로 끝을 맺었다.

카멀라 해리스의 연설은 별로 길지도 않았고 미리 써 온 원고도 없었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는’ 매우 잘 정돈된 고품격 정치가의 선거 승리 선언이었다. 이어진 바이든의 연설은 역시나 ‘무난’했다. 생방송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과연 우리 현역 여성 정치인 중에도 해리스처럼 진정성 있고 품격 있는 연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어느 누가 그처럼 시대적 역사의식과 소통하고 있을 것이며, 격조 높은 언어의 절제미를 구사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정직한 삶의 여정을 통해 스스로 닦은 공직자의 품성과 헌신적 태도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좀처럼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카멀라 해리스가 한국 여성 정치인이 아직 맞이하지 못한 어떤 ‘내일’의 전령(傳令)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교수로 현재 한국NGO학회 회장이다. 주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 민주주의의 패러다임 전환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와 『제3의 아렌트주의』(근간), 역서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 읽기』, 『시민사회』,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책임과 판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