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표기, 이상한 표기

[생활 에세이]

2020-09-27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텔레비전 자막은 우리말 공부를 망치는 주범이다. 맞춤법 틀린 게 너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 몇 개 들어보자. “우리에 사랑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서슴없이 쓴다. 한두번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이라고 바르게 쓴 경우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웃긴 얘기”는 또 뭔가?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의 인터넷 언어를 그대로 옮겨 쓰기 시작하여 맞는 표기를 아예 밀어내고 말았다. 영화 제목도 이런 식으로 표기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이제는 “웃기는”이나 “우스운”을 밀어내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바른 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대로 퍼 나르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돈을 내놓던지!”라는 자막도 “내놓든지”를 제친 지 오래다. 다시 말하지만, 어쩌다 그러는 게 아니다. 옳은 표기를 최근에 본 적이 없다. 자막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표기들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심한 노릇이다. 그들은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도 제대로 안 배운 사람들인가? 대중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심각하다. “우리에 사랑이 변치 않게 내게 웃긴 얘기를 해주던지 사랑에 편지를 보내던지 해 주세요!” 끔찍하다.
 
수학자들이 뿔났다고 한다. 잘 쓰고 있던 꼭지점을 “꼭짓점”으로 써야 한다고 맞춤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 된 얘기이긴 하다. 사이시옷 규정이란 것이 참 요망스럽다. 명사 둘이 붙을 때 어떨 때는 사이시옷을 쓰고 어떨 때는 안 쓴다는 것인데, 그 법칙이 참으로 어렵다. 순우리말일 땐 어쩌고 한자말일 땐 저쩌고 외래어일 땐 또 어쩌구... 그런데 어떤 말이 순우리말인지 한자말인지 일반 대중들이 어떻게 다 안단 말인가? 한글문화연대 창설자이고 한자도 웬만큼 배운 나도 잘 모르는데... 책상머리 서생들의 탁상공론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규칙을 만들어놓았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북어국이 북엇국이 되고 무국이 뭇국이 되었다. 그럼 다시마국은 다시맛국, 아귀찜은 아귓찜? 명태국은 명탯국? 서대랫국, 조갯국... 그리고 멍게찜은 멍겟찜?(그런 게 있다면...) 맞춤법에는 맞을지 모르나 참 옹색하고 이상한 글자 모양들이다.
 
태어나서 수십 년 동안 장마비를 “장마-비”라 발음하며 살았는데, 그 표기법 덕분에 “장맛-삐”라 발음해야 하게 되었다. 어느 발음이 맞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사이시옷 넣고 된소리 만드는 것보다 안 넣고 순한 소리 내는 게 경제적이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할 것 같은데... 그냥 장마비로라고 쓰고 쓴 그대로 장마비라고 읽으면 정말 안 되겠니?
 
그건 그렇고, 텔레비전을 보니 ‘우윳값’ ‘나랏빚’ 등으로 표기하는데,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위의 사이시옷 규정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 이전에 애당초 우윳값이 한 낱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아래 한글 프로그램에서도 틀렸다고 빨간 줄이 나온다.) “우유 값”이 옳은 표기라 생각한다. 그것이 한 낱말이 될 수 있다면, 두붓값, 채솟값, 참욋값도 한 낱말이 되어야 할 것이요, 나랏빚이 한 낱말이 될 수 있다면 동넷빚, 회삿빚, 마누랏빚, 지자쳇빚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수많은 복합명사들이 모두 사전에 기재되어야 할 것이요, 그렇다면 우리말은 아마 세상 언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어휘 수를 자랑하게 되리라.
 
그리고 예컨대 토박이말에는 사이시옷을 붙일 수 있고 외래어에는 붙이면 안 된다는 발상의 논리적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냥 자의적인 규정일 뿐이다. 나랏빚이 가능하고 우윳값이 가능하다면 컴퓨텃값은 왜 안 될 것인가? 또 사이시옷을 넣을 수 있는 경우에만 복합명사가 되는 논리적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윳값이 가능하다면 기름값, 당근값, 팬션값은 왜 안 되는가? 사이시옷을 넣을 수 없어서? 그러면 그건 또 왜? 심오한 논리가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복잡한 규정을 다 몰라서 그럴 것이라 생각해 본다. 아는 건 적고 눈에 거슬리는 것은 많은 한 할배의 투덜거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글 맞춤법 교정, 띄어쓰기 규정이 전문가들 나름대로의 이론과 논리가 앞서서 글 대중의 실용성이나 편의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전문가들만 알 수 있는 규정은 옳은 규정이 아니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