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고정되지 못하는 의미들

[박영택의 그림이야기]

2020-09-13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37, 서울 동빙고동, 2020, 30x20cm, Gelatin Silver Print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 속에는 무수한 사물들이 놓여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선 언어와 교육, 경험 등을 통해 내 몸 바깥의 것들을 이해한다. 언어의 명명성에 의해 사물들은 하나씩 자신의 이름을 갖는다. 그렇게 해서 세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규정과 관념의 결과물일 수 있다. 언어나 문자가 실제 세계와 등가의 관계를 갖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우리는 언어와 문자 없이 저 세계, 사물을 지시하거나 그것을 의식 안으로 수렴할 수는 없다. 어쩌면 예술은 우리가 세계에 투사한 개념이나 일방적 지시체계인 언어의 그물에서 빠져나와 생생하게 그것들의 민낯을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혹은 그 결과가 아닐까? 

김태진의 흑백사진은 서울의 어느 골목길, 길가를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것들을 수습한 것이다. 불현듯 습격하듯이 눈에 들어와 박힌 것들이고 생각거리를 안겨준 것들이다. 비근하며 익숙한 것들이자 어디에나 편재하는 공간, 사물이다. 주로 벽과 바닥, 계단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용도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일련의 사물들이 날카로운 명암의 대비 안에 적조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부재한 이 공간은 각 물질의 질감들이 이룬 여러 피부가 맞닿아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 벽돌은 그 물성을 힘껏 드러내면서 흡사 추상조각처럼 재료 자체의 성질과 기본적이고 단순한 형태를 반복해서 보여주거나 납작하고 평평한 상태를 그림처럼 안긴다. 도시의 안쪽에 자리한, 골목길을 둘러싼 풍경은 외부에서는 잡히지 않는 시선이라 내부로 잠입하듯 들어가야 하나씩 등장한다. 획일적이고 보편적인 풍경인 동시에 그 주어진 지형과 길과 들어선 건물들의 조건에 따라 저마다 다른 얼굴을 작은 선물처럼 안기는 공간이다.

작가는 한적하고 인적 없는 시간대에 골목길을 탐사하듯 다녔다. 그것은 거의 무방비의 상태여서 목적의식적인 시선을 거두고 다가오는 것에 순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욕망 없고 표적을 망실한 눈들은 대신 별것도 아닌, 흔한 것들을 다소 낯설게, 다시 보게 된다. 그  대상, 사물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익숙한 개념, 상식들이 허물을 벗는 자리에 생경하고 희한한 존재가 대신 들어선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름을 무화시키는 이 시선은 언어의 지시성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로 육박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선험적으로 대상을 규정하거나 작업의 개념을 설정해서 포착하기 보다는 우연히 마주한 것들을 건져 올리려는 태도이자 주관적이거나 자아를 앞세우기 보다는 인연에 따른 만남을 중시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통로, 흐름으로서 옆으로 새는 것들, 의미로 고정되지 못하는 것...사회적 관습이나 협약이 사라진 상태 즉, 모든 것이 다 허용되는 상황이 만들어낸 이 불안한 낯선 경험을 통해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토로하고 그 감정의 울림에 의해 다양한 의미생성이 펼쳐질 조그마한 틈이 만들어지길”(작가노트)

@ #56, 서울 녹번동, 2020, 20x30cm, Gelatin Silver Print

우리는 암암리에 사물, 세계가 무엇이라는 특정한 이해를 하고 살아간다. 교육과 경험, 학습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 언어와 문자 등의 개념에 의해 사물이 온전히, 낱낱이 해명되거나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전적 지식과 날것의 사물은 별개의 것이기도 하다. 예술은 차가운 개념에 저항에 몸으로, 감각으로 대상에 가 닿는 일이다. 명명백백하게 파악할 수 없는 사물로 되돌리고자 하는 일이 바로 예술의 일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사물에 대한 인간의 습격과 폭력으로부터 사물의 사물성에로 이르는 길을 마련’해준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 작품은 사물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낯설게 드러낸다. 이미 익숙해 있는 사물에 대한 이해로부터 거리를 취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의 틀인 개념이 사물에 덧입혀져야 하는데 이에 반해 예술은 사물 속의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일이며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미술의 주된 특성이기도 하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업이나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현대미술의 여러 경향들이 바로 그러한 낯설게 하기의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대상의 피부에 밀착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재현술인 사진 또한 사물/대상에 대한 낯선 인식을 제공해준다. 좋은 사진은 그런 사진들이다. 이미 알고 있는 개념으로 덧칠한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미끄러진 어떤 틈이나 구멍을 홀연 드러내 버리는 것이다. 벤야민은 우리가 정신분석학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카메라의 접근과 절취를 통해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한 개의 조각으로, 참된 세계의 파편으로, 상징의 토르소로 분해”된 사진은 오직 하나의 개별성과 파편들의 불연속 속에서만 의미와 무의식적인 것을 안긴다는 것이다.
 
김태진은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 그 어느 부분엔가 시선이 가 닿아 만나버린 장면을 보여준다. 이 우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조우는 특정한 형태를 지닌 것도 아니고 시선을 잡아 끌만한 것도 아닌, 그저 애매하게 퍼질러지거나 문질러진 것들, 엇갈리고 겹쳐진 부위들이다. 미묘한 흑백으로 절여진 감성적인 톤들은 비근한 도시의 구석, 벽과 바닥과 이상한 구조물들이 혼재되어 있는,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이질감이 감도는 풍경의 어느 부위에 가 닿는다.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고 명암의 날카로운 대비가 공존하고 있다. 자신의 삶의 동선, 서울의 어느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우연히 포착한 이 장면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고 도시에 내장되어 있는 속살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은 보이는 외관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 표피에서 만난 이상한 감정이나 상념의 뒤를 추적해나가는 일이다. 시각적인 대상에 기대어 그것들이 거의 초현실적으로 만들어내는 또 다른 소음을 듣는 일이다. 그러니 작가가 찍는 대상은 결국 무(無)라고도 말해 볼 수 있다.

김태진의 사진은 의미 있는 공백, 텅 빔으로서의 사진, 무의식적인 것의 출현에 보다 가까워보인다. 사진에서 무의식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한 것과 그 같은 사고방식, 재현행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 언어나 이미지로 포착하거나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들을 사로잡으려는 지난한 시도가 무의식을 가시화하려는 욕망이기도 한데 사실 모든 이미지는 그런 불경스러운 욕망을 거느린다. 하여간 작가는 잠재된 무의식의 지층에 잠긴 어떤 욕망의 실체를 사진으로 꺼내놓고자 한다. 언어 밖의 영역이고 표상 밖의 영역, 터부의 영역 말이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