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스펙트럼의 생생한 변천사를 담아낸 책

[신간소개]

2020-08-23     김한나 기자

■ 색의 역사: 뉴턴부터 팬톤까지, 세상에 색을 입힌 결정적 사건들 | 알렉산드라 로스케 지음 | 조원호, 조한혁 옮김 | 미술문화 | 240쪽

색이 천대받았던 과거에조차 인류는 무의식적으로 색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었다. 독일의 위대한 사상가 괴테는 색상환의 일종인 ‘기질을 나타내는 장미’를 만들어 색과 사람의 성향을 연결했으며, 심지어 색에 특정한 직업군을 지정하기까지 했다. 컬러 차트를 고안했던 윌슨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일터에서 색이 미치는 심리적 효과에 주목했다. 그는 색을 적절하게 활용해 수백만 근로자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질병 퇴치에도 도움이 되고자 했다. 1704년 뉴턴은 백색광을 분해해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의 범위인 무지개 스펙트럼을 밝혀냈다. 우리에게 익숙한 ‘빨주노초파남보’는 이렇게 탄생했다. 무엇보다 이는 색채 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전에 회화에서도 아주 낮은 위치에 머물렀고, 대중적으로도 천박하다고 생각됐던 색에 모두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색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색에 대한 이해는 처음에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초기 연구자들은 섞을수록 흰색이 되는 비물질적인 색과 섞을수록 검은색이 되는 물질적인 색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에 인류는 비물질적인 색(RGB)을 물질적인 색(CMYK)으로 변환해 컬러 인쇄에 활용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색채 연구소 팬톤의 컬러칩은 삼천여 개에 이른다. 일곱 가지 색에서 출발했던 우리는 이제 삼천 년 동안 ‘올해의 색’을 지정하기에 충분한 색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2020년 팬톤은 올해의 색으로 클래식 블루를 선정하며 그 이유를 “클래식 블루는 의지할 수 있는 안정적 기반을 지니고 싶어하는 우리의 염원에 부응하는 컬러”라고 밝혔다. 인간을 표현하고 드러내며 더 나아가 치유하는 색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인류가 존속하는 이상 색의 스펙트럼은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이 책에는 색채 연구에 앞장섰던 여러 화학자와 미술가, 사상가들이 고안한 다양한 색상환이 실려 있다. 대부분은 일반적인 다이어그램 형태이지만 육각형, 별 모양 등의 보다 정교한 모델과 얼룩처럼 퍼진 것도 있어 눈길을 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중 대부분이 컬러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론가들은 자신의 색채 이론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몇백 부의 책에 수작업으로 색을 칠하는 복잡한 공정을 감행했다. 이들은 채색공을 고용해 정확하게 색을 칠하도록 철저하게 감독했으며 전문적인 매뉴얼을 만들기까지 했다. 작은 종잇조각에 색을 칠해 일일이 책에 오려붙인 패트릭 사임의 『베르너의 명명법』에서는 장인정신마저 느껴진다. 책에 실린 생생한 원본 자료들은 색에 대한 인류의 남다른 열정을 보여준다. 180여 개의 도판들을 다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의 다채로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그들의 노력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인상주의의 태동에 튜브 물감의 발명이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페인트를 돼지 방광으로 만든 작은 봉지에 옮겨야 했다. 준비 과정이 번거로워 아틀리에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화가들에게 휴대가 간편한 튜브 물감의 발명은 일대 혁신이었다. 이들은 야외에 나가 순간적인 빛의 효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즉, 색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자 인상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으로 저렴한 안료가 대량생산되자 풍부한 염료와 물감을 활용한 상품이 범람해 소비주의에 박차를 가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색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구체적 실체이면서도 발견해야만 보이는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색은 그 어떠한 요소보다도 당대의 미의식과 관념을 여실히 반영한다. 색의 역사를 파헤치는 일은 당대 사람들이 세상을 시각화하고자 했던 노력을 살펴보는 것과도 같다. 책을 덮으면 그 옛날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을 때처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저마다의 색깔로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