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양동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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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양동 가는 길
  • 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영어영문학
  • 승인 2020.04.0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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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에세이]
▲ 선생님에게 갈 때마다 마트 앞 간이천막에서 연노란색 백합 다발을 산다. 선생님은 이 꽃을 좋아하신다. 엷은 회색 도자기에 담아 소파 앞 앉은뱅이 상 위에 놓는다. 두 손으로 감싸듯 하며 환하게 웃는다. “어머나, 이런 향기가 나네.” (서숙 교수의 '가양동 가는 길' 중에서)

가양동 시니어 하우스에 간다. 선생님이 몇 년 전부터 계시는 곳이다. 연말을 앞둔 거리. 미세먼지 자욱하고 삭풍이 불고 마른 잎들이 거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선생님은 올해도 건재하셨다. 신문잡지를 챙겨 읽고 중요한 기사를 오려두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총기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여전해서 “아이, 그런 거 다, 무시하세요.” 말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단한 고령이신지라 허리는 굽고 거동은 불편하다. 그리고 . . . 

선생님에게 갈 때마다 마트 앞 간이천막에서 연노란색 백합 다발을 산다. 선생님은 이 꽃을 좋아하신다. 엷은 회색 도자기에 담아 소파 앞 앉은뱅이 상 위에 놓는다. 두 손으로 감싸듯 하며 환하게 웃는다. “어머나, 이런 향기가 나네.”
 
팔십이 넘은 꽃 파는 할머니는 30년 넘게, 눈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같은 자리에서 양동이에 가득 꽃을 담아놓고 앉아 있다. 때로는 할머니와 꽃들이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랜 시간 꽃과 함께해온 그의 직업의식 또는 자존감은 분명해 보인다. 가령  손님이 원하는 포장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가 포장지와 리본을 고른다. 급하다고 적당히 묶어달라고 해도 끝까지 다듬어 자기만의 꽃다발을 완성한다. “내가 30년을 이걸 한 사람이야.” 중얼거린다. 

꽃다발을 헝겊 가방에 넣은 뒤 길 건너 제과점에서 과자 한 상자를 산다. “엔디 뭐라나, 어홀이라나, 이름도 어렵지, 그 사람 그림이래요.” 여주인은 분홍 포장지로 싸면서 말한다. 전철을  타러간다. 바람 속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들은 가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쫑긋거린다.

한파 속 오전 11시경. 열차 안에는 드문드문 검은 모자를 눌러쓴 중년의 등산객들이 보인다. 입구 쪽으로 젊은 할머니가 서너 살 인듯한 손녀를 한쪽 팔로 안고 앉아있다. 나는 그 옆에 꽃다발이 든 가방을 챙기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얼마 지나서 그가 묻는다. “아유 생화인가? 요새 생화 보기 어려운데. 이런, 향기도 나네.” 빨간 모자 쓴 아이도 말간 눈으로 꽃을 보고 나는 그 아이를 본다. 한동안 우리는 꽃만 보고 달린다.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아. 여러분 여기를 보세요. 두 할머니가 있네요. 한 명은 어린 손녀를 안고 있고 또 한 명은 꽃이 담긴 가방을 챙기네요. 하이고.” 전철 안이 환해지고 생기가 도는 듯하지요? 꽃들은 조용한 열차 안에서 이렇게 희미한 흔적을 남겼다.

전철에서 내려 층계를 거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온다. 바람이 심해진다. 선생님의 젊은 시절. 대학원생 우리들은 이맘때면 그 집이 있는 안개 자욱한 언덕을 올라갔다. 집 안에 있는 미남이가 짓기 시작하고 우리들은 꽃다발을 앞세우고 녹색 작은 철문으로 들어갔다. 옛날이 소환하는 이 미약한 설레임. 나는 고개를 흔든다. 그래, 새해에도 선생님은 꽃처럼 환하게, 그때처럼 건재하실 것이다. 

저 앞에 낯익은 고층건물이 보이고 나는 걸음을 재촉한다. (2019년 12월 24일)
 

서숙 이화여대 명예교수·영어영문학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미국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 1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서숙교수의 영미소설 특강』 시리즈와 산문집 『따뜻한 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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