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윤리와 사회 규범 – 헤겔의 철학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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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윤리와 사회 규범 – 헤겔의 철학 극장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4.0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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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48강>_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 「내면 윤리와 사회 규범」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시리즈 ‘삶의 지혜’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어 있다. 48강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상환 교수는 근대 사회가 “개인의 양심과 인격을 신성불가침한 권리로 끌어올려 공동체의 규범 자체를 그 아래 두기까지” 했다면서 그처럼 “개인에게 무한한 권리를 부여할 때 공동체 문화”는 파편화될 수 있고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규범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개인들만 있고 인륜적 공동체는 없는 사회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로부터 촉발되는 문제, “근대적인 자유의 개념을 중시하면서도 우리는 다시 인륜적 실체 속에 안락하게 거주하는 행복을 되찾을 수”는 없는지, “개인의 내면 윤리와 사회 규범이 활력적인 조화를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없는지를 되묻는다. 그와 관련하여 다른 어떤 지적 도전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고찰”한 저작이라 할 “헤겔의 『정신현상학』으로 돌아가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볼 것을 제안한다.

▲ 지난 3월 14일, 김상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공개 녹화로 진행됐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3월 14일, 김상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8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공개 녹화로 진행됐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근대적 세계와 행복의 상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사회는 전체의 조화가 우선시되어 개인의 개념 자체가 형성되기 어려웠다. 반면 근대 사회는 개인의 양심과 인격을 신성불가침한 권리로 끌어올려 공동체의 규범 자체를 그 아래 두기까지 한다. 사회적 질서와 그것을 떠받치는 규범 자체가 개인의 자율적 판단과 양심에 의해 승인될 때만 효력을 지닐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 무한한 권리를 부여할 때 공동체 문화가 파편화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규범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개인들만 있고 인륜적 공동체는 없는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으로 돌아가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이 책에서 헤겔은 근대적 실천 세계의 근본 특징을 “인륜적 실체의 파괴”와 거기서 개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행복의 상실”로 집약한다. 그것은 곧 “인륜적 실체 속에 깃들어 있다는 행복의 상실”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자유 개념과 개인주의가 등장하면서 뒤따르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자유의 개념을 중시하면서도 우리는 다시 인륜적 실체 속에 안락하게 거주하는 행복을 되찾을 수는 없는가? 개인의 내면 윤리와 사회 규범이 활력적인 조화를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없는가? 사실 이것이 헤겔의 실천 철학 전체를 끌고 가는 근본 물음이다.

칸트의 윤리 혁명

근대적 자유 개념은 루소에 처음 제시되고 칸트에 의해 개념화되었다. 이 두 철학자에게 자유는 자율(Autonomie)로 정의된다. 칸트 이전의 윤리학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선(善)’이었다. 그리고 그 둘레를 도는 것은 ‘법(法)’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선과 법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법을 윤리학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태양의 자리에 놓고 선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는 것이다. 칸트는 이처럼 선 중심의 윤리학을 법 중심의 윤리학으로 대체한다. 법은 이제 사회 구성원이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편적 규칙이 된다. 그 규칙은 예외를 허용치 않는 절대적 구속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규칙에 부합하는 행동은 ‘선하다’ ‘좋다’ ‘착하다’라고 말해지는 반면, 그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악하다’ ‘나쁘다’ ‘죄다’라고 말해진다. 선악은 이제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도덕 법칙과의 일치 여부를 가리키는 술어에 불과하다.

개인주의적 전회의 배경 

동질적인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善)을 놓고 합의한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출생 지역, 문화나 교양, 종교적 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서 이상적인 인간이 무엇이고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를 놓고 합의하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이합집산하는 곳일수록 평화의 길은 규칙을 적게 하는 데 있다. 구성원들이 사이좋게 살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의 규칙을 정하는 것, 그렇게 정해진 규칙은 무조건 따르는 것, 이것이 평화롭게 사는 길이다. 법 중심의 윤리학은 이런 필요성에서 유래한다. 법 중심의 윤리학에서 도덕 법칙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니고, 그런 의미에서 의무라 불린다.

칸트는 근대적인 삶이 요구하는 이런 의무의 윤리학을 가장 먼저, 그리고 완결된 형태로 제시한 철학자다. 칸트에 의해 고대의 덕 윤리는 도시적인 삶에 부합하는 의무의 윤리로 전환된다. 칸트 이후 의무의 윤리학에서는 더 이상 이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이상적인 법칙이 궁극의 물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법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에게는 자유를, 사회에는 정의를 허락하는 법칙이다.

헤겔의 이의 제기

헤겔에게서는 자율성의 원리와 그것이 대변하는 도덕성의 위상은 축소된다. 자율성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로 격하되는 대신 그것을 객체화하는 사회 규범(법률)과 역사가 중시된다. 특히 헤겔에게서는 역사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모든 존재자의 중심에, 그리고 그 배후의 개념 자체 내에서마저 역사가 비밀을 간직한 채 숨 쉬고 있는 것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증명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런 역사적 재구성의 방법,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이자 정신현상학인데, 여기서는 자율성 개념마저 역사화된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개인의 자율성을 핵으로 하는 도덕성(Moralität)에 공동체의 역사적 삶을 대립시키고, 그것을 인륜성(Sittlichkeit)이라 부른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은 공동체 차원의 인륜성 안에서만 구체적 내용을 얻는 동시에 특수한 행위 지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도덕성에 대한 인륜성의 일방적 우위를 부르짖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헤겔은 인륜성이 다시 도덕성에 의존하는 측면에 대해 강조한다. 즉 한 공동체의 인륜적 규범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의지와 행위를 통해 비로소 형식적 활력을 얻는다. 인륜적 공동체가 지닌 자기 조율 및 개선의 역량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에 비례한다.

헤겔의 철학 극장 

헤겔의 실천 철학 전체는 도덕적 개인과 인륜적 공동체 사이의 이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중심 문제로 한다. 개인의 자율적 내면성과 공동체의 인륜적 삶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는 이상적인 지점에 서서 그것이 가능할 조건을 묻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적인 상호 관계의 가능 조건에 대한 물음은 두 가지 길 위에서 펼쳐진다. 논리적 체계 구성의 길과 역사적 재구성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헤겔은 만년의 『법철학』(1821)에서는 논리적 체계 구성의 길을 따라 도덕적 개인과 인륜적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지점으로 나아간다. 반면 청년기 저작인 『정신현상학』(1807)에서는 어떤 역사적 재구성의 관점에서 그런 이상적인 지점에 이르기까지 유럽 문화가 거쳐 온 다양한 역사적 단계와 그 단계에 고유한 체험을 극적인 장면화의 기법을 통해 서술해간다.

방대한 규모의 이 대작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볼 만한 부분은 근대적 개인주의를 대변하는 다양한 유형의 주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대목이다. 「이성-장」(Ⅴ장) 후반부(2부와 3부)와 「정신-장」(Ⅵ장) 후반부(3부)가 그런 대목에 해당한다. 이런 부분에서 헤겔은 개인의 내면 윤리와 사회 규범이 이상적으로 일치하기까지 근대적 개인이 걸어가야 할 오인과 좌절의 길, 혹은 기만과 희생의 여정을 비극적인 시선을 통해 서술해간다. 그것은 이성적인 사회가 실현되기까지 근대적 주체가 걸어야 할 회의와 절망 길이자 완성된 지혜에 이르기까지 겪어가야 할 형태 변화의 과정이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그것은 「이성-장」에 등장하는 쾌락적 주체, 혁명적 주체, 도덕적 주체, 표현적 주체, 입법적 주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신-장」에 등장하는 양심적 주체다. 이런 근대적 주체들은 프랑스 혁명 후 칸트가 열어놓은 독일 관념론 시대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헤겔을 포함한 당시의 독일 지식인들은 영국 산업 혁명과 프랑스 정치 혁명에 상응하는 정신 혁명이 자국에서 일어났다고 믿었다. 이웃 국가에서 일어난 정치경제학적 영역의 근대화를 자신들이 사상적 차원에서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혁명인가?

그 정신 혁명은 의식이 이성적 사유에 도달하는 사건, 그래서 “관념론의 입장에서 현실에 관계하는” 사건이다. 이때 이성적 사유의 핵심은 “자신이 곧 온갖 실재라는 확신”에 있다. 그것은 실재의 온갖 원리가 더 이상 사유에 낯선 어떤 것이 아니라 사유 자체에 내재하는 원리와 일치한다는 믿음, 다시 말해서 사유(선험)와 존재(후험)가 동일한 이성의 서로 다른 실현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적 확신이다. 이때 이성은 단순히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사유나 인식 능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와 사유를 관통하는 논리, 우주를 지배하는 로고스(Logos)에 가깝다. 그것은 인간 이성이라기보다 세계 이성이고, 그 세계 이성의 관점에서 현실에 관계하는 것이 독일 관념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이 점을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명제로 정식화했다. 자연에는 더 이상 의식 내 선험적 법칙과 어긋나는 것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그 명제는 자연의 영역에 이어 이제 정신(문화)의 영역도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기가 다가왔음을 함축한다. 인류가 마침내 인륜의 세계도 의식에 주어진 원리들을 통해 파악할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은 사물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듯 법률과 관습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 『정신현상학』 「이성-장」(Ⅴ장) 전체는 이런 관념론적 확신을 세 단계로 나누어 검토한다.

첫 단계에서는 자연을 관찰하는 이성 혹은 이론적 이성이 주인공이다. 이 부분은 「관찰하는 이성」 제목 아래 펼쳐지는데, 이성이 자연의 생명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대목과 뼈(두개골)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대목에서 정점에 이른다. 즉 자연의 생명 현상은 이성이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이성은 생명적이고, 생명은 이성적이다. 그러나 유기체 못지않게 뼈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적 본질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관념론적 이성이다. 즉 “정신은 뼈다.”

두 번째 단계는 실천적 이성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펼쳐간다. 이 부분은 「자기 자신에 의한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우리가 검토할 향유의 주체, 마음의 주체, 덕성의 주체는 이런 실천적 이성의 세 얼굴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인륜적 공동체의 관습과 법칙 속에서 아직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인륜적 현실에서 일탈하거나 그 현실과 맞서 있다. 그들은 세상의 원칙이 아니라 자신에 고유한 원칙에 따라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창작적 이성 혹은 표현적 이성이 주인공이다. 표현적 이성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인문-예술에 종사하는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법칙을 제정하거나 검증하는 인물이다. 하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여 거기에 숨어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인륜적 실체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그것을 법칙의 형식으로 표현하거나 그 표현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행동의 차원에서는 이미 인륜적 규범의 본질에 도달했으나 아직 그 실체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헤겔이 볼 때 자기 이전의 독일 관념론은 아직 이 수준에 멈추어 있다. 칸트에 의해 시작된 관념론 혁명은 헤겔 자신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인륜적 삶의 파편화와 복구 

『정신현상학』 「이성-장」(Ⅴ장)과 「정신-장」(Ⅵ장) 전체를 지배하는 기본 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거기서 대단히 분명한, 그리고 상호 일치하는 출발점과 도달점을 지닌다. 그리고 서로 겹치는 그 두 지점이 두 장 전체의 라이트모티프에 해당한다.

이상적인 사회, 그것은 그 구성원 개개인이 타인과 더불어 자유로운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공동의 인륜적 삶 속에 이성이 완전히 실현되는 사회다. “여기서 이성은 현재적으로 살아 있는 정신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살아 있는 정신 속에서 개인은 자율성을 구가하면서도 비로소 “실체 속에 깃들어 있다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런 이성적인 사회가 헤겔 드라마의 대단원이다.

이런 도달점은 출발점으로의 복귀다. 왜냐하면 행복한 인륜적 삶은 고대 사회에서, 유럽 역사의 출발점인 그리스 민족에 의해 향유된 바 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는 부분과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마치 예술작품 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작품에는 근대 사회처럼 개인이 없었다. 이제 문제는 개인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다시 그런 아름다운 인륜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유럽 민족의 역사(민족정신의 역사)는 고대의 인륜적 공동체가 파괴된 후 다시 거기에 도달하는 기나긴 시련 및 도야(Bildung)의 여정이다. 독일 관념론 시대는 그런 형성의 역사에서 마지막 국면을 이룬다. 로마 시대, 봉건 시대, 계몽기와 프랑스 혁명이라는 멀고 먼 우회의 길을 거쳐 이제 아름다운 인륜적 공동체를 회복하기 직전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정신현상학』 「이성-장」(Ⅴ장 2~3부)은 칸트에서 괴테, 그리고 훔볼트에 이르는 독일 지성계를 그린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독특한 형태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모습과 그로 인해 인륜성이 파괴되는 방식을, 그리고 마침내 그 분열의 끝에서 새로운 인륜성이 탄생되는 모습을 서술한다. 이와 달리 「정신-장」(Ⅵ장)은 그리스에서 독일 관념론에 이르는 유럽 정신의 역사 전체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3부)에서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이 헤겔식으로 극복 및 완성되는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런 연출 역시 성숙의 극단에 이른 개인주의로부터 공동체 정신이 탄생하는 사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맺음말

첫째, 개인의 자율성은 근대의 위대한 발견이자 우리 시대의 근본 편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의 실상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자율성은 자유의 필요조건 혹은 형식적 조건에 불과하다. 자유의 충분조건 혹은 내용적 조건은 개인의 무한한 자기도야와 형성을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륜적 실체의 내용을 내면화하지 못한 개인에게 자율성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어떠한 행위 지침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지한 개인의 자율성은 오히려 한편으로는 아집과 망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정신의 파괴를 낳을 뿐이다.

둘째, 자율성 이념이 요구하는 자기형성의 마지막 단계는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지(絶對知)’라 불린다. 그 절대지는 무슨 영원하고 신적인 지식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대의 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자기형성의 마지막 단계를 말할 뿐이다. 이 단계는 한편으로는 어떤 전인(全人)적 교양의 관점에 선다는 것과 같다. 이론, 실천, 표현의 어느 한쪽에 갇혀 있는 상대적 교양이 아니라 그 세 영역을 가로지르는 포괄적 교양을 바탕으로 시대와 호흡하는 단계인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전인적 교양의 주체들 사이에 공정한 인정 투쟁의 무대가 열린다는 것과 같다. 절대지는 어떤 고정된 내용과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대에 제기되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당대의 역사적 현실이 뿌리내린 초월론적 평면으로 돌아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일 뿐이다. 물론 이 초월론적 평면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적 선험성의 장(場)이고, 그런 유동적인 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전인적 교양의 주체들 사이에 자유로운 토론과 경쟁이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행복은 개인적인 도덕의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인륜적 공동체의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선(善)은 현실 저편의 이상적인 세계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세계 안에서 찾아야 한다. 행복도 선도 이성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성적인 사회 내에서만 추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그리는 뫼르소와 채만식의 소설 『탁류』가 그리는 초봉이는 겉보기만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두 주인공은 공동체 내 이성의 퇴락 속에서, 그에 따른 인륜적 실체의 파괴 속에서 개인이 맞이해야 하는 비극적 희생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탁류 사회에서는 누구라 해도 참된 선을 구하기 어렵고, 따라서 그 누구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은 표면상 이런 헤겔 윤리학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으로 보인다. 푸코-들뢰즈의 ‘소수자 윤리’든, 레비나스-데리다의 ‘차이의 윤리’든 헤겔을 넘어서려는 공통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가 중심의 인륜성 개념과 목적론적 역사관은 철저한 타파의 대상이다. 헤겔의 유럽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는 서양인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동양인의 관점에서도 반드시 청산해야 할 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반-헤겔주의가 의도하는 것은 헤겔이 구하고자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편이든 저편이든 역사의 흐름이 왜 탁류에 휩싸였는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역사의 흐름이 다시 맑아질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변화된 흐름에 부합하는 이성의 논리를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양쪽은 이편저편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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