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압도하는 포화된 현상의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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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압도하는 포화된 현상의 매혹
  •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 승인 2020.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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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

■ 역자가 말하다_ 『과잉에 관하여: 포화된 현상에 관한 연구』 (장-뤽 마리옹 지음, 김동규 옮김, 그린비, 2020.02)
 

이미 오래전부터 당대 최고의 현상학자 중 한 사람이자 형이상학의 역사와 데카르트에 관한 최고 수준의 학자로, 또 철학적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낸 사람으로 알려져 온 장-뤽 마리옹(1946~)이지만, 국내에서 그의 철학은 여전히 수수께끼 상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2015년 전후로 마리옹에 대한 소개나 연구가 국내에도 여러 편 나오긴 했지만,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그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우리 학계에서 여전히 미진한 편이다. 이런 와중에 그의 현상학 삼부작의 세 번째 권인 『과잉에 관하여』의 우리말 번역본의 출간은 마리옹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새로운 현상학적 사유에 목말라하던 독자들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줄 수 있는 소중한 ‘사건’이 될 것이다.

이미 70세 중반에 접어든 마리옹이지만, 오랫동안 소르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일한 후, 지금도 시카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철학적 여정에서 가장 큰 업적으로는 데카르트를 위시한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 현상학의 혁신, 그리고 『존재 없는 신』으로 대변되는 탈형이상학적 신-담론을 꼽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한 가장 많은 학위논문과 연구논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역시나 그의 ‘주어짐의 현상학’이다. 왜 주어짐의 현상학이 그토록 큰 주목을 받아왔는가? 그것은 마리옹이 주어짐의 현상학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나타나는 현상의 등급을 재조정하기 때문이다. 그의 전통 현상학에 대한 해석은 다소간 일방적인 것일 수는 있지만, 그의 입장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는 각각 현상을 초월적 의식의 주체의 대상이나 실존론적 존재 이해를 추구하는 현존재의 존재 의미로 환원시키는 잘못을 범한다. 그러다 보니 전통 현상학은 현상학의 주요 동기인 현상 자체의 특권화라는 지향점에서 벗어나 대상의 본질로서의 대상성이나 존재 이해라는 전통 형이상학의 사유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리옹은 이런 전통 현상학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순수한 주어짐 그 자체로 환원된 현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 나타남을 기술하고자 한다. 여기서 순수한 주어짐이란 어떤 형이상학적 대상의 대상성이나 존재 의미로도 환원될 수 없는 현상 자체를 뜻하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초래한다. 그렇게 순수하게 주어지는 현상이 대체 무엇인가? 마리옹에 의하면, 어떤 현상의 주어짐이 우리의 인식 능력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주어진다면, 그것은 대상으로도 존재 의미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개념에 앞서 주어지는 인식의 내용으로서의 직관을 초과하는 현상이 다름 아닌 포화된 현상이다. 다시 말해 칸트적 의미에서 인식은 직관과 개념의 결합인데, 나에게 주어지는 현상이 직관에 대한 나의 수용성을 초과한다면 당연히 개념화 작업으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마리옹은 이렇게 자신이 새롭게 벼리어 낸 현상 개념이 역사적으로 볼 때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칸트가 제안한 ‘숭고’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 크기를 가진 현상이 주어질 때, 칸트는 거기서 비롯하는 경이로움을 숭고라고 부르면서 거기에 어떤 개념적인 총괄적 판단을 부과하기를 거부한다.

▲ 장 릭 마리옹(Marion, Jean-Luc)
▲ 장 릭 마리옹(Marion, Jean-Luc)

마리옹의 포화된 현상도 이와 비슷하다. 특별히 그는 포화된 현상을 숭고라는 한 단어로 포괄하기보다 사건, 우상, 살, 아이콘, 계시로 구분해서 설명하는데, 『과잉에 관하여』에는 포화된 현상의 이런 각각의 유형들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이 담겨 있다. 비록 이 현상에 관한 세세한 철학적 근거 제시나 철학사적 전거 제시 등을 볼 수는 없지만(이런 작업은 그의 현상학 삼부작의 둘째 권 『주어진 것』(Étant donné)에서 이루어진다), 현상학이 현상의 주어짐을 기술하는 학문이라면 독자들은 본서를 통해 포화된 현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사건의 예를 들어보자. 지금 내가 어떤 강연이 펼쳐질 강연장에 한 사람의 청중으로 있다고 해보자. 이 강연에는 분명 주제를 제시한 포스터가 있고, 사람들은 그 포스터의 제목대로 그 강연을 지칭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 강연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현상이 지닌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그 강연장에서 벌어질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할 수는 있겠지만, 또한 그곳은 내 기대를 벗어나는 강연자의 발언, 돌발적인 예시, 유머, 그리고 어디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날카롭거나 진부한 청중의 질문, 사회자의 때로는 따분한 진행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강연장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사건을 예견하고 내 지향이 온전히 충족될 가능성을 제로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이 강연회의 주어짐은 나의 지향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초과하는 직관으로만 남고 나는 바로 그 주어짐의 현상에 대한 이러저러한 해석만 할 수 있을 뿐, 개념적 판단에 이를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마리옹이 드는 포화된 현상으로서의 사건에 대한 기술을 요약한 것이다.

사건 이외에도 우리는 우상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특별히 마리옹은 우상이라는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압도하는 현상으로 그림을 예시로 든다. 이를테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어떤 형태도 없이 색의 질감만으로 감상자를 신비의 심연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색의 압도적 도래 앞에 나의 시선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내가 로스코와 그의 그림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건 없건 간에, 나는 그 그림의 주어짐이 이끄는 매혹에 사로잡힌 채로 그 그림을 개념적으로 포착하지 못한 채 그 현상을 응시하게 된다.

이처럼 포화된 현상은 분명 이례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이렇게 평범한 방식으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내가 언제든지 체험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마리옹이 제시한 포화된 현상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으로서, 예외적인 사례만을 특화한 것이라기보다 일상적인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초월, 다시 말해 내재성 안에서의 초월을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마리옹의 포화된 현상은 우리의 인식 능력을 압도하는 과잉의 어떤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분리된 채로 벌어지는 극단적 신비는 아니다. 물론, 마리옹은 계시 체험을 포화된 현상의 영역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극단적 신비를 말할 가능성까지도 내포하는 폭넓은 현상학을 구가한다. 이런 점에서 포화된 현상은 일상성 안에서의 이례적인 것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마리옹 특유의 창조적 개념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은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다채롭고 풍요로운 현상학적 기술을 본서 『과잉에 관하여』에서 접할 수 있다. 현상학의 역할이 단지 특정 현상학자의 논증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주어짐을 기술하는 데 있다면, 마리옹은 이 책에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독자들이 본서를 기반으로 삼아, 일상 안에서 일상을 초월하는 독특한 현상들의 의미에서 비롯하는 매혹적인 순간들을 함께 체험해보면 좋겠다.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총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벨기에 루뱅 대학교(KU Leuven) 신학&종교학과에서 마리옹의 계시 현상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는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탈출에 관해서』, 『해석에 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공역)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공저),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공저), 『선물과 신비: 장-뤽 마리옹의 신-담론』이 있다. 현재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연구원,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의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VU Amsterdam) 종교&신학과 박사 과정에서 현대 유럽 대륙철학과 종교철학, 종교 간 대화 문제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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