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집단의 차이, 차별 그리고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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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집단의 차이, 차별 그리고 인정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3.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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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삶의 지혜 47강>_ 김영란 숙명여대 교수의 「문화·집단의 차이, 차별 그리고 인정」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여섯 번째 시리즈 ‘삶의 지혜’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보람 있고 성숙한 삶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이번 시리즈는 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객관적인 사실, 또 보다 넓은 사고와 관점에서 처세와 이존(以存)을 보다 확실한 삶의 사실에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전체 50회로 구성되어 있다. 47강 김영란 교수(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영란 교수는 현대 사회가 “다양한 차이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 얽히고설켜 있어서 차이를 비켜가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라고 하면서 한국 사회도 “포괄적인 혹은 포용적인 ‘우리’를 원하는 태도와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태도 사이에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때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차이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더해 문화 측면에서도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배척할 때” 생기는 차별의 메커니즘에 대항하여 인간 모두가 “유동적 정체성의 존재로서 다양한 정체성의 그물에 포획”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모든 영역의 차별을 향해 시선을 열” 것을 이야기한다.

▲ 지난 3월 7일, 김영란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공개 녹화로 진행됐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3월 7일, 김영란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삶의 지혜〉’의 4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공개 녹화로 진행됐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포괄적 ‘우리’와 배타적 ‘우리’

인류 최고 발명품 중 하나인 민주주의는 국민이자 유권자인 정치 주체 그리고 법적 주체를 생성한 것으로 신분 집단이 아닌 ‘개인’이 부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유, 평등, 권리 같은 민주주의 원칙이 보편화, 제도화되었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하여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차이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을 동등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신념을 확인했다. 이는 보편적 인권 개념에 따른 동등 대우 원칙에 해당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 발명품과 선언은 그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회는 자기만의 방식에 따라 소수자들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는 민주주의, 평등, 개인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은 다양한 차이와 신분, 계급, 종교 같은 특수성을 무시하고 수많은 사람, 집단을 차별과 배제 속에 밀어 넣는다.

1970년대 이후 정체성 즉 개별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부상되었다. 전 세계적 이주, 다양한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인종, 민족, 종교, 성 등 정체성의 차이에 대한 인정 요구 역시 강력히 분출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소수자 집단이 공론장에 등장하면서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인정 요구도 커졌다. 소수자 집단은 부정적 고정관념과 함께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에 대한 차별 행위는 종종 사회적으로 쟁점화했다.

차이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으로 배척할 때 차별이 생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포괄적인 혹은 포용적인 ‘우리’를 원하는 태도와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태도 사이에 흔들리고 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이질적이고 더욱더 다원화된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소수자의 소리와 다수자/주류 집단의 소리가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이정표를 세워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배타적인 ‘우리’에서 포괄적인 ‘우리’가 되는 길을 어떻게 모색해가야 하는가?

차이에서 차별로 가는 메커니즘

우리는 모두 다르다. 우리의 개별적인 특이함은 태어나면서 혹은 상황이나 선택을 통해 속하게 된 집단의 특이성 속에서 발현된다. 이를테면 언어, 사투리, 신념, 문화, 종교, 민족, 사회적 계층, 인종 등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다름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가치 평가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한쪽을 구분하고 다른 역할을 부여하는 근거로서 ‘다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된다. 범주화는 차이가 차별로 가는 과정에서 첫 계단인 셈이다.

고정관념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의식과 행위에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작용한다. 차이는 범주화를 거쳐 신념 차원의 고정관념, 감정 차원의 편견, 행동 차원의 차별로 이어진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고정관념은 누군가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알아보지 않고 수월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고정관념은 어느 범주에 속한 사람은 모두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과도하게 일반화된 생각을 하고, 해당 집단 개개인의 성원에게 적용하는 경우다. 고정관념은 성, 나이, 신체, 계층, 인종, 민족, 종교, 지역 등 광범위한 차원에서 적용된다. 단순하고 획일적인 고정관념은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개인의 무한한 잠재력을 부정하고 억누르는 결과를 낳는다.

고정관념은 소수자 집단을 어떻게 위협하는가

첫째, 낙인의 내면화를 들 수 있다. 고정관념은 소수 집단에게 낙인을 받아들여 내면화함으로써 불평등 체계를 정당하게 생각하고 도전하지 못하도록 한다.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검열하는 내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둘째, 고정관념의 위협(stereotype threat)을 들 수 있다. 사람은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면 그 고정관념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증거를 더하고 결국에는 고정관념에 따라 판단되고 취급되리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부정적 고정관념을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이 때문에 수행 능력이 낮아져 결국 고정관념대로 부정적인 결과에 이른다.

고정관념은 도덕적 회피와 도덕적 공황을 가져온다

과도하게 일반화된 고정관념은 인종이나 성에 기초한 불평등한 지위와 역할 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시킨다. 소수 집단이 겪는 실업, 빈곤, 질병 같은 문제를 소수자의 개인적 특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다수 집단이 느낄 수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회피시킨다.

다수자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소수자 집단의 행동에 대해서 도덕적 공황(moral panics)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도덕적 공황은 사회의 다수 집단이 특정 집단을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위협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려는 하나의 현상으로 현실에서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고정관념으로 왜곡 및 확대 재생산되어 사회 전반에 공포감을 정형화시키기도 한다.

편견

편견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실제적 경험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각에 의거하여 내린 판단이나 행동’으로 미리 내린 판단을 의미한다. 고정관념이 어떤 현실에 대한 일반화라면 편견은 고정관념을 근거로 내리는 (부정적) 평가이다. 편견은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집단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배제와 차별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함으로써 집단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점이다. 편견은 사회적으로 확대되어 인종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고 국가 정책으로 성립되며, 정치적으로 압제, 차별, 박해, 추방, 집단 학살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편견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편견은 인지적, 정의적, 행동적 차원의 복합물이다. 인지적 차원은 신념 체계, 지식 기반, 사고 체계를 말하며, 어떤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믿는 개인에게서 발견된다. 정의적 차원은 어떤 집단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감정과 관련 있다. 외집단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드러내는 태도는 편견의 핵심적 특징이다. 행동적 차원은 개인이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가장 가시적이다. 그렇다면 편견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편견은 사회적 거리감으로 잴 수 있다

이 편견의 정도를 ‘사회적 거리감’으로 측정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감이란 ‘서로에 대해 경험하는 이해와 감정의 정도’ 혹은 ‘공감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개념이다. 편견은 소수 집단과 다수 집단 간 사회적 거리감을 넓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서로의 교류와 상호작용을 가로막는다. 소수 집단은 주류 사회의 자원으로부터 배제되고 자기계발과 신분 상승의 가능성 또한 차단된다. 결과적으로 소수 집단의 생활 기회는 제한되고 삶의 질은 떨어진다.

차별과 배제

차별은 성이나 장애, 종교, 민족, 인종, 지역 등 개인의 태생적, 사회적 성격을 근거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서 권리와 자유를 부정하거나 합리적 이유 없이 배제되거나 구별,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차별은 명백하고 의도적이지만 때로는 은밀하게 행해질 수 있으며, 차별 의도가 없음에도 결과적으로 차별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과 편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다르다. 편견은 마음속에 깊이 잠재해 있다가 계기가 생기면 바로 표면에 떠오를 수 있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편견과 차별은 그 양상에 따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편견이나 차별이 없으며 점차 자신의 확신 안에서 확고하게 유지되는 경향이다. 두 번째 유형은 편견은 없어도 차별적인 행동에 가담하는 경우다. 세 번째 유형은 편견은 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부적절하거나 불법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는 유형이다. 네 번째 유형은 편견과 차별을 가지며 증오 집단을 지지하거나 가담하는 것이다.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첫 번째로 다양한 공간에서 차별을 겪는 사람은 자존감을 잃고 역량을 발휘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기 쉽다. 사회의 권력을 쥔 이들이 정한 규정이 사회 전체의 표준이 되고, 피해자들은 차별을 내재화하면서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낮은 자아감을 지니며 차별에 순응하게 된다. 두 번째로 차별 대상이 되는 사람(집단)은 차별 요인이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커버링(covering)이라고 한다. 주류에 부합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는 인정 투쟁을 부른다

차별과 배제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주류 사회의 자원과 기회 구조로부터 밀어내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성, 민족, 인종이나 피부색, 신체적 조건 등에 의한 소수자라는 이유로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인식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형태 중 가장 흔한 것이 차별이다. 타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정의 훼손을 뜻하며, 한 사람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배제하는 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차별은 인정과 부정 사이, 참여와 배제,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가르는 잣대인 셈이다.

차이에 대한 인정

인정 개념이 쟁점화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인정 투쟁 개념이 주목받게 된 실천적 배경에는 사회 운동, 여성,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사회적 투쟁이 있었다. 개인이나 집단 간의 정체성 차이가 우열을 나누거나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됨으로써 사회적 차별을 낳는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대 와서 차이에 대한 인정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학자로는 찰스 테일러, 악셀 호네트, 낸시 프레이저가 있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인간의 정체성이란 사회적 인정이 요구되며, 이에 대한 부정은 인간을 억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보았다. 개인은 인간이라는 동일성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니며, 이에 상응하는 것이 개인의 차이나 진정성에 대한 인정이다. 차이의 인정은 차이의 정치를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인정의 정치학은 타자나 집단의 정체성, 그에 따르는 삶의 유형이나 사고방식이 가지는 나름의 가치와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개념이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인정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개인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갖게 하는 심리적 조건이라고 보았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인정 문제를 자아 존중이나 자존감 등 자아실현이라는 심리적 문제이며, 재분배와 인정은 동등한 참여에 내포된 두 가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말한다. 동등한 참여란 물질적 자원이 공정하게 배분되고 동시에 각각의 참여자가 독립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문화 위에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최근에 인정과 분배는 정책과 연결되어 논의되고 있다. 문제는 나라마다 소수자 집단과 관련된 정책들이 분배와 재분배 문제에 집착하면서 개인이나 집단의 문화적 오인, 무시, 멸시 때문에 겪는 정서적, 인격적 고통과 제도적 불평등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의 다양성: 차이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경제적 불의와 문화적 불의는 서로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은 경제적 기회를 얻지 못해 그 결과 다시 무시당하고 배제된다. 불공정한 편견을 지닌 문화적 규범은 제도화되어 있으며 동시에 경제적 불이익은 공적 영역과 일상에서의 문화 만들기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차이에 대한 인정이 제도와 문화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이상적으로는 문화 변혁을 통해 사회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법적 규범 없이 실질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 인정 관계를 구속력 있게 규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제도적 장치이며 이런 점에서 차이의 존재로 인정받으려는 사회운동의 목표 역시 이에 대한 제도화에 있다.

차이 인정의 제도화

차이를 인정하는 제도화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먼저 차이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다. 인간을 차이의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은 제도적 의미에서 차이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모든 사람을 동등한 권리 주체로 대우하는 것이다.

차별 금지만이 제도적으로 모든 인간을 ‘차이의 존재’로 인정하는 방법은 아니다.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더욱 적극적인 방식이 요구된다. 인간이 차이의 존재이자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은 모두에게 자아실현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기회가 실질적으로 보장될 때 그 의미가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 집단에 대해 분배와 인정을 고려한 정책이라 할지언정 정책 시행 과정에서 문화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불평등은 완화될지 몰라도 인정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문화 변혁을 통한 차이 인정

오늘날 경제를 기초로 한 계급, 사회적 지위에 기초한 계층 또는 사회적 차이, 인종적 차이, 문화적 차이 등 다양한 차별화가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화적 차이에 대한 사회문제도 두드러지고 있다. 문화적 차이는 현실적으로 문화 소비나 문화 생산에서의 차이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에 영향을 주기에 실제로 계급적 차이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문화 변화를 통한 차이 인정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우리는 모두 유동적 정체성의 존재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사람은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성별, 학력, 지역, 성적 지향, 장애, 질병, 경제력, 외모, 나이 등 다양한 범주에 든 사람들이 사회에서 정한 주류와 소수자의 경계를 오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범주에서는 차별받는 위치에, 어떤 범주에서는 특권적인 위치에 교차적으로 놓여 있다. 누구도 모든 범주에서 주류도, 소수자도 아니다.

국민 정체감도 변하고 있다. ‘한국인의 기준’ 역시 혈통-문화적 정체성(한국 출생, 한국인 부모, 한국 거주, 한국의 문화적 전통 계승, 한국어 능력)과 정치-법적 정체성(한국의 정치 제도와 법 존중, 한국인에 대한 자각, 한국 국적 소유, 한국 발전에의 기여)을 오가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단일민족주의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다문화·다인종 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며, 우리 모두 다원화 사회의 유동적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모든 영역의 차별을 향해 시선을 연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경로가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의견이 같은 사람만 상대하고 다른 목소리를 걸러냄으로써 오히려 소통을 어렵게 하거나 소통 단절을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노력, 능력을 강조하고 직업적 성취라는 궤도만 따라가도록 하면서 사람들 간의 해체나 고립화를 기대한다. 우리는 이에 맞서서 우리 사회에 있는 다양한 소수자 집단에 관심을 쏟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 내에서도 다양한 가치와 관점이 부상하고, 특히 세계화 과정에서 다른 문화들이 만나고 있다. 다원화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다. 다원화는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만 바꾸지 않는다. 이미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변화시킨다. 누군가는 자유와 권리를 느끼고 누군가는 불안감, 위협으로 느낄 것이다. 상대를 기존의 틀에 가두려 하거나 도전하는 자로 여기는 일은 닫힌 사회가 가는 길이다. 서로 같고도 다른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눈을 떠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더욱더 다원화하는 사회에서 유동적 정체성의 존재로서 다양한 정체성의 그물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질화된 사회를 넘어 차이를 인정하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다원화된 사회를 구상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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