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노조,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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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노조,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 승인 2020.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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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사색]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교원노조법 위헌 판결과 2020년 3월 30일까지 법률을 개정할 것을 판결했다. 이 판결은 사회와 교수집단 내부에서 쟁점이었던 ‘교수가 노동자인가, 아닌가’논쟁의 종료를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판결의 핵심내용은 ‘대학 교원들이 향유하지 못하는 단결권’의 보장이다. 또 ‘교육부 혹은 사학법인연합회를 상대로 근무조건의 통일성 등에 관한 교섭권’의 보장이다. 2001년 11월 전국교수노동조합은 출범한 이래로 비로소 법적 지위를 갖게된 셈이다. 환영할 일이다. 교권 일반이 약화되고 재단비리, 학내 주요정책의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 구축과 실효성 있는 운영, 학과 폐과 및 퇴출되는 대학에서 발생하는 생존권 문제, 학사 운영 전반과 교육환경 및 교육과정의 전반적 개선만이 아니라 고등교육 정책의 문제 등과 같은 현안들에 대해 교수노조는 긍정적인 영향력과 조정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수노조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때 발생하는 순기능들이며 대학 내 그리고 대학 밖에서 교수노조에 기대하는 바이다.

하지만 기대와 더불어 우려와 회의의 시선도 있음을 산별 노조의 성격을 갖는 전국교수노동조합이나 개별 사업장인 각 대학의 교수노조는 인식하고 그러한 우려의 시선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문제해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교수노조가 대정부의 행정행위에 대한 비판과 정당성 물음만이 아니라 학내 각종 현안에 대한 문제제기의 자기 정당성과 비판의 전제조건으로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질 때 문제해결의 주체로서 승인받을 수 있으며, 실제적인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는 교수노조의 전신인 각 대학의 교수협의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경험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있고 판단의 정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을 수 있으나 감각지수나 경험지에 기초해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는 것을 건강한 이성의 소유자라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교수협의회의 현상학을 보자. 1) 교수들의 무관심으로 실제적으로 해체된 경우 2) 명목적이고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경우 3) 집행위와 소수 참여자들로 인해 유사교섭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일반 교수에게도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 4) 어용 집단화된 경우 5) 준노동조합 수준의 학내 영향력을 가진 경우 6) 노동조합의 3권을 부분 행사하는 경우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대학이 1), 2), 3)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판단된다.

교수협의회의 존재 현상학과 위상의 제고 이전에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노동조합 형태로 출발하는 이즈음에 향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이다. 각 대학의 교수협의회가 보여줬던 전형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많은 대학의 교수협의회는 비정년 전임교수들의 교수협의회 가입을 허용하지 않거나 회식을 통해 명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2) 많은 대학의 교수협의회는 다양한 형식의 비정년 트랙 전임교수의 열악한 처우와 구조적 차별의 개선에 관심이 없거나 대학본부의 해결 의지를 압박하지 않는다. 3) 교수협의회는 교수집단의 계급구조(정년전임, 비정년 전임, 산학협력 교수, 강의전담교수, 초빙교수)의 타파(특정 교수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갑질행위의 근절 포함)를 위한 학내 연구교육 공동체의 상호협력 체계 구축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홍성학 전국 교수노조 위원장은 비정년트랙 교수 문제에 대해서도 약자 우선주의를 강조하면서 “정년트랙 교수든 비정년트랙 교수든 함께 가야 한다” 고 말한다. 당위적 발언이고 강의교수, 초빙교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협의체 조직을 갖추지 않는 이상 실효성은 의문이다. 

교수협의회가 보여준 행태는 이해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조합주의‘에 매몰됐다고 할 수 있다.
교수협의회가 교수노조로 전환된다는 것은 조합주의가 오히려 강화되거나 아니면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구체적 정의실현과 교육공동체적 연대감을 발휘할 기회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교수 노조원이나 촌로들이 롤즈의 정의론을 모른다고 해도 정의에 대한 감각은 있고 실천해야 하는 도덕적 책임감이 있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건 개인윤리 차원에서건 말이다. 정의 원칙은 별것이 없다. 첫째, 대학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학내 교육과 관련된 모든 일에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간강사에서 정년 전임까지 교육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에 근거해 협력체계를 운영해야 한다. 최소 지성과 최소 도덕을 가진 자라면 말잔치로 되지 않는 사실을 알 것이다. 제일 작은 시도는 교수로서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갖고 있는 비정년 전임의 교수 지위 인정이다. 둘째, 교수노조는 대학 내에서 가장 약한 자, 계급화로 인해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가(시간강사)를 생각하고 ‘최대의 이익’은 아니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피해를 막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합주의만큼 달콤한 유혹과 냉정하며 동시에 파괴적인 우아미, 계급구조 내에서 권력감을 향유하기 좋은 그릇도 없다. 교수노조가 조합주의에 빠진다면 부정의 한 구조에 대한 암묵적 동의자이자 은밀한 협력자이다. 정의를 말하면서 학내 부정의에 침묵하고 부담 없는 편승의 태도는 ‘아무 생각 없는 자’들에 의해 구축되는 악의 평범성이다. 지금 교수들은 물어야 한다. 교수노조 너는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하는가? 교수노조 너는 또 다른 권력기관이 되고 싶고 부정의의 공범자가 될 것인가? 너는 학문·교육 공동체의 정의의 안내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홀로 아리랑’을 더 열심히 부를 것이냐? 결국 선택은 너의 문제이다.
  

이하준 편집기획위원/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독일현대철학

한남대 탈메이지교양대학 철학교수로 베를린 자유대에서 아도르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유럽철학 편집위원,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대전인문예술포럼 부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사회철학, 사회이론, 문화예술철학, 고전교육 등이다. 저서로는 『부정과 유토피아』,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 『아도르노의 문화철학』,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 『역사철학, 21세기와 대화하다』(공저) 등이 있으며, 그 외 고전교육 및 예술 관련 책도 다수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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