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보다 인포데믹이 더 무서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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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보다 인포데믹이 더 무서운 이유
  • 김기태 세명대‧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 승인 2020.03.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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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우리나라에서 2004년 번역 출판된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의 <이미지와 환상>(원제 <Image>)을 읽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선 내가 그토록 개념화하기 어려워했던 ‘이미지’라는 단어를 도처에 널려 있는 일상의 잔해만으로도 이처럼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책의 원전이 1962년에 출간된 것이었음에도 60여 년의 시공을 초월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더도 덜도 아닌 ‘이미지 생산공장’ 정도로 간단히 해부해버린 그의 선견 앞에서는 오싹함마저 느껴야 했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번에는 ‘나의 실체’, 나아가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실체’에 대한 의심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시작한다. 가짜 같은 진짜와 진짜 같은 가짜가 전혀 구별되지 않는 상황에 맞부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어스틴은 “오늘날 우리가 본말이 전도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반세기도 훨씬 전에 한 말임에도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20세기에 이르러 실물보다 이미지가 중요하고, 진본보다 모사나 축약이 대접받는 세상이 도래했다면 21세기에는 그러한 이미지화 양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악화(惡貨)만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게 아니라 악인이 양인을 쫓아내고, 가상공간이 현실공간을 지배하고, 영웅의 자리에는 어느샌가 스타 시스템이 생산해 낸 유명인들이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뜬구름이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겉돌고, 구체적인 삶의 실체를 돌이켜볼 때마다 온통 공허함이 배어나는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부어스틴은 “언론 자유는 이제 인위적으로 만든 뉴스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 기자들이 갖는 특권을 점잖게 표현한 말에 불과하다.”라고 선언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대로 보도하는 진짜 뉴스가 점차 보도자료의 형태로 미리 제공된 뉴스로 대체되는 현실을, “이게 진짜냐?”라는 질문보다는 “이것이 뉴스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이 더 중요한 현실을 이처럼 매우 간명하게 표현한 글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또 부어스틴은 미국의 산업화, 민주화, 영상화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바꾸었으며, 여기서 사람들이 날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상적인 활동을 가리켜 ‘경험(experience)’이란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경험이 가짜 사건을 통해서 가짜 이미지를 믿고 진짜 현실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이미지’로 포장된 가짜 현실 또는 가짜 사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진짜’에서 관심이 멀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진짜 현실이란 우리 삶의 실제 조건을 통해 파생되는 문제들, 예컨대 우리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며, 먹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집을 장만하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가짜 현실은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 즉 진짜 현실을 방치하도록 만든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경험을 방해하고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가치 있는 정보를 습득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모순을 망각하게 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미지 중시현상은 대학가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요즈음 학생들의 과제를 점검하다 보면 그래픽 기능을 활용해서 매우 보기 좋게 편집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대개는 검색 기능만으로 얻은 정보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해서 실망하곤 한다. 검색에만 의존하지 말고 탐색 및 사색의 과정을 거친 후 결과물을 내어놓을 때 학습 또는 연구한 과정뿐만 아니라 그 성과물 또한 오롯이 자기 몫이 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 듯해서 안타깝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 코로나19 창궐 같은 국가적인 동시에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 속에서도 바이러스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짜뉴스가 퍼져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더욱 염려스런 것은 대학 구성원들 중에도 그런 가짜뉴스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바이러스 팬데믹(pandemic)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인포데믹(infodemic)인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가짜 사건은 연관된 다른 가짜 사건을 또 부추기고 증폭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식으로 가짜 사건은 다른 분야로까지 계속 이어져 가짜 여행, 가짜 베스트셀러, 가짜 광고, 가짜 현실, 가짜 이미지, 가짜 예술 등으로 전체 사회에 퍼지게 된다.”고 한 부어스틴의 경고를 지성인들이라면 반드시 되새겨보기 바란다.


김기태 세명대‧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미디어와 저작권의 상관성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출판편집자로 일하다 2001년부터 세명대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문헌번호운영위원장 및 한국전자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연구윤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저작권 및 연구윤리에 관한 자문 및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2018년에 <생활 속의 표절과 저작권>이 K-MOOC 강좌에 선정되었으며, 저서로 <출판실무와 저작권>, <김기태의 저작권 수업>, <동양 저작권 사상의 문화사적 배경 비교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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