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니(Romani)라 불리는 집시(Gypsy)의 뿌리는 인도 돔바(Do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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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니(Romani)라 불리는 집시(Gypsy)의 뿌리는 인도 돔바(Domba)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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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11)_ 돔바(Domba)의 겨울

▶흔히 ‘집시’라 불리는 로마니 사람들이 거리에서 축제를 즐기는 모습. 마케도니아 수도에 로마니들이 모여사는 마을 Shukta에서 촬영한 사진. (출처: theplaidzebra.com ⓒM.Tomoski)
▶흔히 ‘집시’라 불리는 로마니 사람들이 거리에서 축제를 즐기는 모습. 마케도니아 수도에 로마니들이 모여사는 마을 Shukta에서 촬영한 사진. (출처: theplaidzebra.com ⓒM.Tomoski)

정처(定處)에서 벗어나 길을 떠나는 건 홀로 있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홀로 있음으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비로소 자유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런 순간을 경험하기에 낯선 곳이 좋고 밤 시간이 좋고 자연의 품속이 좋다. 내 경우 몽골 초원의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때 무너져 내리는 별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열락(悅樂)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갑작스레 쏟아져 내린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오대산장 툇마루에서 올려다본 은하수의 고요한 향연 또한 그 어떤 고상한 연회와 비할 바가 못 된다. 사막의 밤을 밝히는 별들의 말 없는 기도가 귓전에 들리는 듯한 착각은 현실보다 강렬했다. 미국 초절주의 시인 랄프 왈도우 에머슨은 <자연>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누군가가 고독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면, 그에게 별을 보게 하라”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주 자이살메르 사막에서 밤하늘의 별을 배경으로 사막 유목민의 전통음악 연주를 들으며 나는 홀로 있음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본즉 일행들 모두 저마다 홀로 있었다.

어디고 불어드는 바람처럼, 속절없이 흐르는 강물인 양, 어두운 밤하늘 떠도는 유랑 별 마냥 정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일러 흔히 집시(gypsies)라고 부른다. Gypsy라는 말은 사실 Egyptian(이집트 사람)을 뜻하는 에집시엥(egypcien)의 16세기 중세영어 방언형인 gypcian의 변형이다. 16세기 중반 유럽 사람들은 집시들이 Egypt에서 들어온 줄 알고 그들을 egypcien이라고 불렀다. 말이란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 과정에서 egypcien의 어두 모음 /e/가 탈락된 방언형 gypcian이 생겨나고, 또 그것의 변형인 gypsy 또는 gipsy가 탄생했다. 영국인들은 또 gippy라는 모던한 느낌의 용어를 고안해내기도 했다.

온라인 어원사전에 의하면, 동가숙 서가식 떠돌이 삶을 사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인 집시는 스페인어 지타누(Gitano, 여성형은 Gitana), 프랑스어 지땅(Gitan, 여성은 Gitane)과 동족이고, 문자적 의미 면에서는 Coptic(이집트 재래의 기독교파인 콥트교 신자의)이라는 뜻의 터키어와 아랍어 Kipti에 가까우며, 중세 불어에서는 Bohémien, 스페인어로는 “플랑드르 출신(from Flanders)”이라는 뜻의 말 플라멩코(Flamenco)로 불렸다.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로는 징가리(Zingari)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플라멩코는 스페인계 집시 또는 집시의 춤을 가리킨다. 혹시 집시의 일부가 스페인에 들어오기 전 플랑드르 지역에 일시 머물렀다면 그들을 플라멩코라고 부를 수도 있기는 하다.

세계적 사전이라고 해도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집시를 지칭하는 또 다른 명칭인 로마니(Romani)가 외부인들이 부르는 엑소님(exonym) 즉 타칭(他稱)에 대응되는 집시 자신들의 엔도님(endonym) 즉 자칭(自稱)이며, rom의 의미는 ‘man’ 또는 ‘husband’라는 설명이 그렇다. 과연 그럴까?     

줄여서 흔히 로마(Roma)라고도 부르는 로마니(Romani or Romany)는 로마인들(Romanians)의 후손이 아니다. 이들은 유랑이 숙명인 인도 아리안 족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라자스탄, 펀잡, 하리야나 등 북인도 지역과 벵골만을 끼고 있는 벵골주가 이들의 시원지다. 유전자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들이 인도를 떠난 건 512년경이라고 한다. 아직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이 태동하기 전이다.

인도는 사회계층의 분화가 심한 나라다. 우리가 아는 4계급 카스트(caste) -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수드라, 바이샤 - 는 큰 줄기일 뿐이고 실제로는 엄청나게 복잡한 신분의 구별이 있다. 형상은 사람이되, 그리 대접받지 못하는 인도의 천민 계층을 불가촉천민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최하위층에 속하는 집단으로 우리나라 남사당패와 비슷한 예능인 무리인 돔바(domba)가 불가촉천민이다.

인도 서벵골주 서부 변경 지역의 비르붐(Birbhum)과 반쿠라(Bankura) 등지에도 상당수의 Dom 또는 Domba라 불리는 카스트 집단이 거주하고 있다. 여기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바구니를 짜거나 농사를 짓거나 막노동을 하거나 혹은 음악이 필요한 곳에 가서 노래하는 고수 노릇을 하며 생계를 꾸린다. Domba는 ‘북’을 가리키는 ‘dom’과 ‘사람’을 뜻하는 접사 ‘-ba’의 합성어다. 그러니까 “북 치는 사람”인 돔바 계급은 북을 치고 노래하는 유랑 악단인 셈이다. 이들이 가혹한 운명의 힘에 밀려 유럽까지 이동해간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있듯이 인도 돔바도 피치 못할 이주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으나 영혼이 자유로운 이들 돔바들이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며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가다 보니 터키를 지나고 발칸반도를 거쳐 판노니아 평원(The Pannonia Plain: 카르파티아 분지, 헝가리 초원이라고도 함)에까지 이르렀다. 멋모르는 유럽 사람들은 이들이 이집트에서 온 줄 알고 집시(Gypsy)라고 불렀다. 그리고 오늘날 Romani라 불리는 유럽 집시는 바로 Domba의 후손이다.

Domba의 이표기는 많다. 인도라는 나라가 워낙 영토가 넓다 보니 지역마다 사용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Domba도 Domi, Domaki, Dombo, Domra, Domaka, Dombar, Dombari 등의 변이형이 존재한다. 자칭은 Dom이다. 글자적 의미로는 ‘holy script’ 즉 ‘신성문자’인 산스크리트(Sanskrit, sans+krit)는 doma와 dumba, ‘평민의 언어(common language)’라고 할 프라크리트(Prakrit, pra+krit)는 domba라고 한다.

인도는 사시사철 덥다. 북쪽 지방이나 조석의 일교차가 있지, 데칸고원부터 그 아랫녘은 아침나절에는 따뜻하고 낮에는 사정없이 덥다가 저녁이 되어도 한낮의 열기가 식지 않아 밤새 후텁지근하다. 그래서 남인도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만큼은 아니어도 피부색이 암갈색이다. 이 마을 저 마을을 지나고 이곳저곳 낯선 곳에서 풍찬노숙을 감내하며 돔바들은 계속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런 중에 더운 지방에서 살던 돔바들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배고픔보다 추위였다. 객지의 추위는 찬바람과 눈보라만이 아니었다. 낯선 존재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는 정주민의 냉랭함이 겨울 추위보다 혹독했다. 긴 여정 끝에 이름이 돔바에서 로마니로 바뀐 유랑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절은 순환한다는 희망 속에 춤추고 노래하며 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에는 사산왕조 바흐람 5세와 인도 예인집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베짱이처럼 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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