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양자역학’은 양립가능하고 삶은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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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와 ‘양자역학’은 양립가능하고 삶은 의미 있다
  •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 승인 2019.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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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 『빅 픽쳐: 양자와 시공간, 생명의 기원까지 모든 것의 우주적 의미에 관하여』(션 캐럴 저, 최가영 역, 글루온, 2019.11)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 원인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고의 경향은 철저히 인과론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우주 혹은 자연의 차원에서 내가 누군가와 헤어진 것은 어떤 목적이나 의지가 개입한 게 아닐 수 있다. 물론 헤어진 이유는 내가 알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관계는 오묘하다. 문제는 인과와 목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과학으로 전이될 때이다. 우주와 생명에 대해 철저하게 과학적 사고를 하다 보면 원인이나 자유의지나 목적은 희미해질 수 있다.

최근 국내 번역된 『빅 픽쳐』는 양자역학의 시대엔 외부의 동기나 원인 없이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원인이나 의지나 목적은 인간의 세계에서 존재한다. 중요한 건 세상을 설명하는 각각의 이론은 자신의 층위에서 적합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주가 양자역학에 따라 중첩된 어떤 가능성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는 존재 가능하다. 이론의 개념들을 잘못된 방식으로 혼동해서 쓰면 오류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병이 병균 때문에 생긴다”고 말하는 건 엄밀한 의미에선 옳지 않다. 다만 선용해서 쓰는 것뿐이다.

이론물리학자인 캘리포니아공대 션 캐럴 교수는 양자역학과 우주론으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입자들은 물리 법칙을 따르고 거시적 층위의 인간은 선택을 한다”고 적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창발(創發)’이다. 인간이라는 게 상호 작용하는 양자장론들의 집합으로 설명된다고 하더라도, 그 입자들이 모여 새로운 것들을 떠오르게, 즉 창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양자장론은 입자와 힘이 공간 전체에 넓게 펼쳐져 있는 장으로부터 나온다고 설명한다. 우주는 양자장론의 룰을 따르고, 그녀와 내가 헤어진 건 오해와 다툼 때문이라는 각각의 해석은 충분히 양립가능하다.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있다고 간주하는 건 인간의 입장이다. 자연과 우주로선 그저 모든 게 현상일 뿐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자연계 단 하나뿐이라고 보는 게 자연주의다. 션 캐럴 교수는 자연계를 여러 방식으로 설명 가능하기에 ‘시적 자연주의’라고 표현했다. 우주를 설명하는 각 모형은 그 영역 안에서 각각 진실이다. 예를 들어, 입자와 힘은 그동안 이 세계를 물리적, 즉 양자 이론으로 설명하는 가장 유용한 기본 구성 물질이다.

자연주의가 중요한 건 신의 개입 없이도 생명과 의식 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이론의 정합성과 통일성 역시 고려된다. 션 캐롤 교수는 이 세상이 ‘하나의 통합된 현실’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자연주의는 완벽하지 않고 검증해야 할 것들이 많다. 자연은 왜 이 모양이고, 생명과 의식은 어떻게 왜 태어났는지를 말이다. 그래도 답을 가장 잘 줄 수 있는 세계관은 바로 자연주의이며, 자연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찰’이다.

‘원인’ 있다는 건 인간의 입장에서만 타당

▲ 캘리포니아공대 이론물리학자인 션 캐롤 교수는 신, 자유의지, 생명, 의식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며 종합하려고 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 캘리포니아공대 이론물리학자인 션 캐롤 교수는 신, 자유의지, 생명, 의식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며 종합하려고 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저자 션 캐럴 교수는 왜 자연이 이렇게 생겨 먹었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현재의 자연법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부합하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갈릴레이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운동자 없이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 우주는 여러 가능성이 포개진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며, 원인을 추적하다보면 과학 밖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현대 물리학을 총동원하면 이 우주는 그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진화해 온 인간은 의식을 갖고 있다. 션 캐롤 교수는 내면의 경험으로서 의식을 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화법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적었다. 이는 진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 이 우주에 초월적 목적이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시적 자연주의를 고수하는 션 캐롤 교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개인들의 의지와 염원은 숭고하거나 초월적이진 않지만, 묵직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션 캐롤 교수가 쓰는 방법론은 베이즈 추론이다. 그 어떤 이론이나 가정이라도 신뢰도를 100%까지 주지 않고, 새로 접하게 되는 정보를 기반으로 가설을 증명한다. 현 최고의 과학기술로 밝혀낸 입자는 다 드러났다. 따라서 자연주의를 받아들여야 하고, 그 안에서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화법이 가능한 ‘시적’ 자연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시적 자연주의를 인정하고 나면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설명의 모형(이론이 아니라 모형이다)은 그 제한된 영역 안에서 유효하다는 게 저자 션 캐럴의 주장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뛰어넘는 현대의 양자역학은 그 한계 내에서 모두 정당하게 ‘진실’이라는 주장이다.

현대 이론물리학이 찾아낸 바에 따르면, 이 우주는 비결정론에 가깝다. 션 캐롤 교수는 ‘양자 상태’ 혹은 ‘파동함수’만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이 얘기할 수 있는 건 확률뿐이라는 결론이다. 한편, 사람의 심장 박동 수는 평생 30억 회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길이 있다. 환상은 유해하다. 하지만 진실이 주는 보상은 훨씬 더 크다.”고 밝혔다.

케임브리지대 장하석 석좌교수는 『빅 픽쳐』추천의 글에서 “현대과학 지식에 대한 자신감과 인간적 겸허함을 겸비한 수준 높은 지혜를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우리는 우주와 생명에 대한 물음에 수많은 편견을 갖고 접근한다. 이 책은 그 모든 장막을 걷어내더라도 여전히 삶은 의미 있고 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입장이다. 자칫 극단적 회의론에 빠질 수 있는 확률적 우주론의 결과는 참 아름답게 인간으로 다시 향한다.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과학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교수신문> 학술 객원기자를 역임했고 현재는 ‘학술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과학과 기술, 철학, 문화 등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자유롭게 김광석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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