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기본소득’에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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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기본소득’에 말을 걸다
  • 고영남 논설위원/인제대·법학
  • 승인 2020.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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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직설]

코로나 19의 시대를 넘으며 ‘재난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학생의 학습권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시민과 노동자들의 일상이 무너지면서 어떤 이는 생계의 위협을 직접 받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들은 종교적·지정학적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중보건의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가 배제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11조 원 넘는 추가경정예산안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음에도 여전히 모자람이 큰데, 무엇보다도 생산과 유통 등이 멈추면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이들을 위한 ‘재난기본소득’의 제창이 눈에 띈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제도에 찬성하는 사람으로서 이 담론이 가져오는 왜곡을 조금 지적하여 바로잡고자 한다.

먼저, 저 ‘재난기본소득’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 의문이다. 물론 기본소득은 일, 노동, 여가, 소득, 가족, 사회, 국가 등에 대하여 지난 몇천 년 동안 인류와 사회가 믿어왔던 거의 모든 윤리적·과학적 통념과 충돌한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을 지지하는 이유는 지금에 이르러 급변하는 기술적·산업적 조건의 현실은 물론이거니와 노동 이외의 활동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를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보장하려는 데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사회 의제가 되는 배경을 ‘기술변화 등으로 인한 소득창출능력의 양극화와 자본소득의 불평등 등의 소득불평등’에서 찾더라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시민으로 하여금 생계의 위기를 빌미로 모욕적인 절차를 밟도록 만드는 여러 복지수당이나 공공부조정책 그리고 사회보험제도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기본소득의 정당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골고루 보장하는 데 있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각 개인에게 지급되어야 하며, 그것도 현금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현물 지급은 2차 매매시장이 형성될 가능성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자유의 향유에 방해된다. 특히 기본소득은 최저소득보장제도와는 달리 아무런 재산조사 없이 사전에 작동하므로 보편성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의무가 뒤따라서는 안 된다. 결국 ‘재난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의 4가지 특징 어느 것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코로나 19와 관련하여 ‘재난기본소득’의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논객들은 적어도 기본소득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그 자체가 기본소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코로나 19로 인하여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 생계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를 위 담론의 배경과 함께 따져봐야 한다는 점이다. 처방은 나름대로 혁신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보수적 정치인들조차도 ‘재난기본소득’을 유행처럼 외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그 원인이나 배경을 굳이 따지지 않는 이유는 또 뭘까? 코로나 19로 야기된 재난이라는 현상에 매몰된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 위함이다. 코로나 19 시대에 등장하는 ‘재난기본소득’ 담론의 본질은 노동이 멈춘 곳에 임금은 결코 없다는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먹혀들 정도로 유연해진 노동시장의 현실에 있다. 백 보 양보하더라도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그저 하나의 법리일 뿐이며 생산관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에 필요한 소득을 설명하는 유일한 법적 논리는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말한다면 일하지 않아도 소득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미처 확보되었어야 할 소득을 조건 없이 보편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소득은 노동을 거쳐 확보되고 그 노동은 시장을 통해 거래될 수 있을 때만 소득을 얻게 된다면, 노동이 거래될 수 없게 되거나 거래하는 시장이 사라지거나 제한될 경우 노동을 통한 소득은 점차 감축되며 이윽고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무조건적 기본소득이긴 하지만, 이는 일을 하지 않아도 지급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없게 된 때 지급되어야 하며 그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더욱이 코로나 19시대에 굳이 ‘재난기본소득’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 재난수당의 담론은 열악한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불안정노동자들이 어떻게 등장하였는지의 물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이제 광범위한 노동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한, 구빈수당의 성격을 가진 ‘재난기본소득’의 정치적 제창은 불가피할 것이다. 불안정노동자를 잉태한 만큼, 즉 착취한 만큼의 재난수당이 요구될 것이며 그대로 이전되어야 한다.

이런저런 지적을 했다고 해서 ‘재난기본소득’의 의제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정치적 방안의 배경을 분명히 따져야 함이고 더욱이 그 처방전에 맞는 용어를 붙이자는 지적일 뿐이다. 기본소득제도를 둘러싼 논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담론의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너무나 짙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소득제도가 제발 뒷문으로라도 조용히 왔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모양새와 내용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고영남 논설위원/인제대·법학

인제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로 <교수평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민주법학> 편집위원이며, 전공은 계약법으로 교육법, 인권법, 주택법, 법여성학 등에도 관심이 많다. 저서로 『여성과 몸』(공저, 2019), 『대학정책, 어떻게 바꿀 것인가』(공저, 2017), 『민법사례연습』(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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