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스승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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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스승은 있는가?
  • 이인규 서울대 명예교수·식물학과
  • 승인 2020.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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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칼럼]

10여 년 전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선생님과 교수님’이라는 글을 투고한 적이 있다. 오늘 우리 대학에는 선생님은 없고 교수님만 존재한다는 현실을 지적한 글이었다. 우리는 이미 21세기에 태어난 자녀들이 성인이 되는 해를 맞고 있어서, 새 시대에 걸 맞는 삶의 페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리 그러하다지만, 오늘의 시대가 겪는 삶의 진통은 너무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서울대학은 지금 생존해 계신 명예교수의 수가 1,1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약 7년 전, 우리 대학 명예교수협의회가 오늘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현직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교육한 것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성찰해 보자는 집담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학생 교육에서 각자가 자신의 전문지식을 전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을지 몰라도, 이들의 삶을 바로 세우는 인성 교육에는 너무 등한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자책하는 모임이었다. 2-30여 명의 명예교수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이 집담회가 해를 거듭할수록, 과거 현직에서 저지른 교육의 실패에 대한 부끄러움을 모두가 실토하면서 오늘 이 시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이 논의 도중에 정부는 인성교육법을 공포하였고, 그 입법을 주도한 우리 대학의 현직 교수와 교육부 담당관, 그리고 학부 및 대학원생을 대표하는 몇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오늘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성교육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 실천 방안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논의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논의한 결과를 검정해 보고자 하여, 초·중·고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성교육수련회를 여름, 겨울 방학 기간에 개최하기로 하였다. 지난 3년 간 이 수련회를 열면서, 우리는 참여한 교사들이 전하는 우리나라 초중등 교육의 현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생생한 증언으로 실감하였고, 오늘 이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학교교육의 갖가지 문제들이 얼마나 심각한 것들인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귀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서 학장으로 행정에 몸담고 있을 때에, 우리 대학을 학과 중심에서 탈피하여 학부제로 바꾸는 일을 주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학의 기초과학 진흥을 위한 연구비의 획기적인 증액을 정부에 요구하기 위하여, 자연계 대학 교수들의 연구업적을 국제적으로 비교하는 소위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논문 인용 지표)를 적용한 적이 있다. 그것은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비에 대비한 교수들의 연구업적을 비교하기 위하여 인용한 지표였다. 이를테면, 그 지표를 조사한 1993년도에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지원된 국가지원 연구비에 대응하는 교수들의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발표논문의 실적이, 상대적으로 비교한 일본의 동경대학과 미국의 MIT 대학의 연구 실적에 대하여, 결코 못지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같은 수준의 연구비가 지원된다면, 우리 대학 교수들의 발표논문 실적이 동경대학은 능가하고, MIT에는 조금 못 미친다는 결과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은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고 있었는데, 대학에 대한 기초과학 연구비의 지원은 세계 5-60위권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지표를 인용한 기초과학 연구비의 지원 캠페인은 주효하여, 다음 해에 정부의  기초과학 연구비가 획기적으로 증액되는 성과를 얻어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용한 이 지표는 유감스럽게도, 교육부의 지지에 따라 그 후 전국 대학들에서 교수 임용을 위한 업적평가의 잣대로 활용되기 시작하여, 대학에서 신임교수를 선발할 때에 교수의 인성이나, 사람됨을 고려하는 그 어떤 지표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이 지표에 의한 연구업적만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대학 풍토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를 절감하며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 결과 오늘 대학에는 참된 스승은 사라지고, 오직 직업인 교수만 있어서, 교육의 황폐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한다.

이 인성교육 집담회에서 법대 교수가 한 말이 가슴속에 남아 영영 떠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를 이끌고 있는 핵심 인재들의 태반은 서울 법대를 졸업한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육법전서의 법률적인 지식만을 교육하지 않고 인성교육을 제대로 했더라면, 오늘 이 나라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황폐한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라는 자성이었다.

직업인 교수가 아닌 제자와 스승으로 만나고, 사랑으로 제자들의 삶을 보살피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대학 사회가 다시 올 날을 간절히 꿈꾸어 본다. 
 

이인규 서울대 명예교수·식물학과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이학석사,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국기초과학연구소연합회 회장, 한국생물과학협회 회장, 아시아-태평양국제조류학회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협의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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