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과 '선'을 가로지르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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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과 '선'을 가로지르는 학문
  • 김태호·춘천교대 국어교육과
  • 승인 2020.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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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교수 단상]

교수가 되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여전히 마감을 앞둔 글들이 산적해 있고 강의로 정신없고 통장 잔고는 부족하다.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그리고 눈물 흘리셨다.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다. 평생 해본 적 없는 효도를 한 건가 싶었다. 그랬는데 교수가 된 기쁨도 잠시, 나는 교수로서 역할을 수행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세 학기가 훌쩍 지나 있다. 신임교수란 딱지를 뗄 때가 되었는데, 그만큼 성장하였는지 자문하면 그렇지 않아 부끄럽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소망하던 삶을 살게 되었다. 시간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여러 책을 펼쳐 볼 공간이 있다. 본받을 만한 교수님들을 지척에서 뵙고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을 생업 삼아 평생을 살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문학 안에서, 학문 안에서 자유롭다고 느꼈다. 이제 문학과 학문을 가까이 하며 살 수 있으니 갈망하던 ‘지성적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감사하다.

남은 문제는 ‘어떤 교수로 살아갈 것인가’이다. 혹자는 교수는 직업 중 하나일 뿐이라 말한다. 이런 시대가 되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 자본에 저항하던 학문과 예술마저 상품화되었다. 지식은 부의 창출에 예속된다. 교수도 연봉에 따라 줄 세워진 직업 중 하나로 평가된다. 더욱이 미래마저 자본에 저당 잡혔다. 비포(Franco Berardi Bifo)는 자본주의적 팽창만이 예정된 미래에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실에, 그러한 미래에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봉준호가 오스카 상을 받았다. 《기생충》은 ‘층’(層)과 ‘선’(線)으로 구획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근사하게 그려냈다. 나는 특히 ‘선’ 앞에 당혹스러웠다. ‘층’은 그 수직성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라도 있으나, ‘선’은 수평적 관계를 가장한 채 비가시적으로 존재한다. 타자는 권력자에 내재한 ‘선’을 감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봉준호의 날선 비판은 미학적 전망을 드러내고 ‘다른’ 미래를 향한 길을 생성한다.

나는 문학교육 역시 동일한 길을 간다고 믿는다. 얼핏 보면 문학교육은 모순된 행위이다. 문학은 사회체제의 바깥을 향하는 원심력인데 비해 교육은 사회체제 내부를 향하는 구심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체제에 동떨어진 분열된 주체를 지향하지 않는다. 교육은 종국적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주체를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과 교육의 접합면은 넓다. 문학교육 연구를 통해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다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학습자를 길러내는 일, 그것이 문학교육 연구자로서 내가 담당할 소명이다.

지도교수이신 신헌재 교수님은 고매한 인격을 갖춘 분이셨다. 교수가 된 막내 제자에게 교수님은 짤막하게 ‘선공후사(先公後私)’라 말씀하셨다. 원론적인 말씀이지만 그처럼 아름다운 말씀도 없었다. 그 분이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 매진하며 살아온 분이시기에 그러하다. 그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소박한 사람이다. 재능도 변변찮다. 그렇지만 내게 주어진 책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또한 그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내게 길을 열어주신 은인들에게 감사하는 일임을 알고 있다. 이렇게 출발점이 매듭지어졌다. 해야 할 일은 그 출발점을 기억하며 최대치를 그려내는 일이다.  

  
김태호·춘천교대 국어교육과

한국교원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문학교육과 아동문학을 연구하며 살아간다. 현재 춘천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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