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무엇인가…그동안 소외됐던 내면과 관찰자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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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무엇인가…그동안 소외됐던 내면과 관찰자를 보라
  •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 승인 2020.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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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평]

■ 과학서평_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제로)』(채사장, 웨일북(whalebooks), 2019.12.24.)
 

이번 겨울은 유난히 우울했다. 나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얼마나 허무할지 고민하다보니 막막했다. 현재가 소중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는 일은 매우 버거운 일이다. 살아있지만 죽어간다는 사실을 주변과 환경으로 인지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다 주변의 권유로 읽게 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는 내가 가진 형이상학적 체계에 일침을 가했다. 나의 독단은 나와 세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데 있었다.

국내에 ‘채사장’만큼 인문학을 대중화 한 작가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소위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권(현실), 2권(현실 너머)로 인기 있는 저자가 되었다. 특히 동명의 팟캐스트는 인문학, 과학, 종교, 예술 등을 넘나들며 학문의 융합이 무엇인지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번에 ‘채사장’은 이 모든 시리즈의 기원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앞의 두 책이 ‘소수의 지배자 VS 다수의 피지배자’, ‘절대주의 VS 상대주의’의 이원론을 다룬다면, 이번엔 고대 이전의 사상들이 기반하고 있는 일원론이 주제다. 나와 세계는 하나라는 게 일원론이다.

내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건 나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내 밖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건 나의 마음, 의식,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서구과학과 철학, 종교에 경도된 채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그 옛날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잊고 살았다. 거꾸로 서구 학문에서는 오히려 동양의 사상들에서 철학과 인생의 해답을 찾고 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사라져도 나의 밖의 세계가 영속할 것이라는 믿음은 나를 덧없게 만든다. 하지만 저자 ‘채사장’이 책을 통해 강조하는 ▶ 범아일여 ▶ 도덕일치 ▶ 일체유심조 ▶ 관념론 ▶ 내면의 신을 고민하다보면 나의 부재는 세계의 부재가 된다. 내면의 바다를 깊이 들여다보면 덧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완결성을 경험할 수 있다.

일원론은 쉽게 말해 ‘자아=세계’라는 등식으로 성립되는 사상이다. 고대 이전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이 일원론을 주창하고 있다는 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의 핵심이다. 기독교는 예외지만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에서 일원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자아VS세계’라는 이원의 세계는 내가 가진 기존의 세계관(색안경)을 내려놓는 판단중지를 통해 불편한 진실에 마주할 수 있다.

“진리에 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용기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내가 쥐고 있던 세계관을 내려놓을 용기를 말한다.”-24쪽.

덧없음에서 벗어나 완결성에 이르는 길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바로 세계의 탄생을 다루는 ‘우주’다. 유한한 인간은 왜 그토록 우주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가? 찰나적 존재인 자아 안에는 영속하는 우주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나, 과학에서 설명하는 빅뱅이 있기 전 과연 어떤 시간이 있었는가? 왜 우주는 현재의 이런 우주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 ‘채사장’은 다중우주론을 설명한다.

다중우주론은 이론물리학자인 맥스 테그마크 MIT 교수의 4가지 층위로 구분된다.

세계가 발현된 주요 요인은 바로 관찰자인 ‘나’

영원한 인플레이션이나 수학적 우주 가설, 브레인 우주론 등은 빅뱅 이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준다. 양자역학을 토대로 하는 다중우주론은 아직 현대물리학에서 정통 과학이론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계속 그 진위를 밝혀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다중우주론은 왜 하필 현재 우주는, 나는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한다.

플랑크 상수 h, 볼츠만 상수 k, 빛의 속도 c(우주 제한 속도), 중력상수 G, 전자의 질량 등은 현대물리학이 건져 올린 최전선의 진리들이다. 물리 상수들은 우리의 우주가 왜 이렇게 미세하게 조정되었는지 다중우주론에 기대어 설명된다. 즉, 무수히 많은 다중의 우주들 중 현재 우리 우주의 상태가 존재할 뿐이다. 신이 개입할 여지가 사라지는 셈이다.

여기서 저자인 ‘채사장’은 다중우주론에 근거한 강한 인간 중심 원리를 제시한다. 여러 다중 우주들은 각각 독립적인 물리법칙들에 따라 존재한다. 그런데 생명이 없는 어떤 우주를 가정할 수 있는가? 그 우주는 우리 우주와는 완벽하게 독립돼 있다. 강한 인간 원리에 따르면, 그럴 수 없다. 관찰자가 없다면 그 우주가 존재한다는 걸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우주의 자기반성 과정이다. 이 세계와 나는 이제 존재의 이유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저자인 ‘채사장’은 “우주와 나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가 빅뱅 뒤에 숨은 초월적 신일 수는 없다”면서 “우주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은 오직 인간의 의식과 사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의식적 존재에게 결코 발견될 수 없고 내부에 의식적 존재를 잉태할 수 없는 우주라면 그 우주가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 우주는 우리가 이곳에서 눈떴기에 비로소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89쪽.

범아일여, 신과 세계는 내 마음에 있다

이어서 저자 ‘채사장’은 인류의 탄생을 얘기한다. 38억 년 전 지구에 최초의 생명이 등장하고, 진화해왔다. 우리는 진화론에 대해 다음 두 가지 큰 오해를 한다. 첫째, 획득 형질의 유전이다. 둘째, 진화에 대한 선형적 이미지다. 둘째 지적은 지극히 타당하다. 진화라는 게 일률적으로 한 방향으로 흘러갔을 리 만무하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생명에겐 모두 다른 환경과 유전에 따른 다른 진화가 발생한다. 심지어 쌍둥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첫째 지적은 최근 과학계가 주목하고 있는 후생유전학 유전에 따르면,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물론 저자 ‘채사장’이 말하고 싶은 맥락에서는 용불용설이 자연선택설로 대체된 것이 맞다. 하지만 후천적 형질이 절대 유전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은 여전이 물음표다.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획득한 형질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경우가 발견되고 있다. 직접 유전자의 염기 서열을 바꾸진 않지만, 후생유전학적 메커니즘이 다음 세대에게 전달돼 유전자 염기 서열의 발현을 후천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즉, DNA 염기서열은 그대로이지만, DNA 메틸화나 히스톤 단백질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나쁜 식습관과 흡연이다.

진화한 인류는 세계 4대 문명이라고 하는 곳에서 각각의 문명과 사상을 발전시켰다. 책에서는 문명 발상의 근원지를 토대로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위대한 사상들인 ‘베다(힌두교)-도가-불교-철학-기독교’를 차례로 알아본다. 인류는 세계와 자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러면서 신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을 갖게 됐다. ▲ A. 범신론 : 신과 인간은 같다. ▲ B. 유일신론 : 신과 인간은 같지 않다. ▲ C. 다신론. 신에 대한 개념은 C→B→A로 진화했다.

그 시작은 ‘베다(힌두교)’이다. ‘채사장’은 <우파니샤드>에 대한 설명을 통해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강조했다. 범아일여를 체험하면 궁극의 지혜에 닿는다고 위대한 스승들은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탈속으로 흐를 여지가 있다. 국가나 사회의 입장에서는 개인들이 고행을 통해 내면의 자아를 깨닫는 동안 일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인도의 3대 경전 중 하나라고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다. <바가바드 기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 또한 신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힌두교는 탈속의 <우파니샤드>와 세속의 <바가바드 기타>를 조화롭게 종합한 종교이다.

힌두교는 좀 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주-자아로 구분되는데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 안에서 다르마(법칙과 질서)에 따라 생성-유지-소멸 운동을 반복한다. 자아의 본질은 불멸하는 아트만이고, 카르마(업)에 따라 탄생-삶-죽음이라는 윤회를 반복한다. 다르마와 카르마가 일치되는 게 이번 삶에서의 선한 행위다.

탈속과 세속의 조화로운 종합으로서 힌두교

도가에서는 탈속의 노자와 세속의 공자가 신유학의 세계관으로 귀결된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 도(우주의 진리) 안에서의 덕(개인의 내면), 덕 안에서의 도를 강조했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처럼 속세를 벗어나 국가 입장에선 통치가 어려워진다. 이때 등장한 게 공자의 강력한 사회 윤리 사상이다. 공자의 사상 역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인간과 우주의 원리가 같음을 보인다. 이제 노자와 공자의 사상은 주돈이를 통해 일원론으로 귀결된다.

불교에선 고정된 실체와 자아는 없고 계속 변한다는 무아론을 설파한다. 불교 역시 오랜 기간 여러 종파들과의 논쟁을 거쳐 대승불교의 <화엄경>을 낳는다. <화엄경>은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를 강조한다. 이 역시 일원론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세계관이 답한다.”-385쪽.

서구의 철학과 기독교는 플라톤의 이데아-현실 이원론을 따라 사상이 정립되다가 칸트에 이르러서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데아-현실, 세계-자아’라는 이원론으로, 기독교는 ‘천국-지상, 신-인간’이라는 대립을 내세웠다. 하지만 칸트는 나의 밖에 있는 인식 대상이 원인이 되어 나한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 결과로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원인과 결과가 바뀌는 순간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외부세계는 물자체(物自體)이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해 서구 형이상학을 완성했다.

칸트의 철학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의식 일반’이라고 불리는 초월적 자아이다. 이 초월적 자아는 내 인식의 활동에서 절대 포착되지 않는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극 감독은 연극 무대에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현대물리학에선 그동안 무시했던 관찰자의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말이다.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기술의 최전선이다. 인류가 밝혀낸 모든 과학적 사실들이 양자역학으로 귀결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의 신 = 신의 나라 => 영원함, 이교도의 신 = 인간의 나라 => 멸망할 것이라는 플라톤적 이원론으로 교리를 체계화 했다. 하지만 신과 인간의 완벽한 분리는 13세기 활동했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독일 신비주의가 등장하면서 다른 세계관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자 신학자였던 스콜라 철학자인 에크하르트는 신과 자아의 일체성을 인식하고자 했다. 바로 일원론이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470쪽.

이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의 의의는 저자 ‘채사장’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외면 받아온 일원론을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서구의 사상들과 과학에 경도된 채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일원론이라는 다른 세계관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실천의 지침을 마련해볼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이 그 유한성에서도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책은 현대 과학기술의 최전선에서 시작해, 그 먼 옛날 4대 문명의 종교와 철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 작업은 충분히 과학적이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지금까지 과학-종교-철학을 이만큼 일관성 있게 아우르는 책은 없었다.


김재호 서평위원/과학전문기자

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과학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교수신문> 학술 객원기자를 역임했고 현재는 ‘학술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과학과 기술, 철학, 문화 등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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