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프레임을 깨부수는 희대의 명화 거꾸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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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프레임을 깨부수는 희대의 명화 거꾸로 보기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6.03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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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의 미술관: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 김선지 지음 | 브라이트 | 340쪽

 

미술이 대중에게 훌쩍 다가선 시대다. 미술이 교양이 된 시대에 우리는 한층 더 깊이 그림을 이해하고 또 나름의 관점으로 사유할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명화라 칭송받는 작품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작품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들려주고 질문을 던진다.

‘명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때는 명화였던 그림이 지금도 명화인가?’ ‘예술성은 화가의 면책 특권이 될 수 있을까?’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그림 속 고다이바 부인이 정말로 벌거벗고 마을을 돌았을까?’ ‘「우르비노의 비너스」 속 비너스는 정말 비너스의 현신이 맞을까?’ ‘중세 화가들은 왜 기괴하고 못생긴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그림을 그렸을까?’ ‘고갱의 작품은 지금도 위대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키 크고 흰 얼굴을 한 예수는 과연 진짜 예수의 모습이 맞을까?’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명화 상식을 뒤집는 질문까지. 이렇듯 작가가 건네는 질문들을 따라 그림을 뒤집어 보고 비틀어 보고 깨뜨려 보면 뜻밖의 관점으로 그림을 다시 보게 된다. 이 뜻밖의 관점은 곧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다.

존 콜리어의 「고다이바 부인」은 중세 시대, 고다이바라는 귀족 부인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기 위해 벌거벗은 채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는 설화를 기반으로 그려졌다. 많은 화가들 역시 고다이바 부인을 그렸다. 그림들은 한결같이 고다이바 부인을 관능적이며 선정적으로 묘사했다. 고다이바 부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그렸다기엔 지나치게 에로틱한 누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관람자들의 관음증을 유도한다. 아름답긴 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을 볼 때 그녀의 벗은 몸보다 미덕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까?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르네상스 시대에 귀족 사회에서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자신에게 작품을 의뢰한 상류층 고객을 위해 밀실 감상용으로 이 작품을 그렸고 당시 유명세를 떨쳤던 고급 매춘부 안젤라 델 모로를 모델로 했다. 그래서 원래 제목도 ‘나체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기존 소유주가 사망하고 그림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16세기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여인의 정체성을 비너스로 규정함으로써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그러니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비너스의 몸을 빌려 신화로 포장한 음란한 포르노그래피이며 그림 속 여인은 당시 상류층 남성의 눈요기를 위한 일종의 핀업걸이었던 것이다.

한편 작가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화가를 소개한다. 1970년대 여성 예술가였던 메리 베스 에델슨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예수와 12사도 자리에 여성 예술가들의 사진을 콜라주한 작품 「현존하는 미국 여성 예술가들」로 유명하다. 에델슨은 ‘왜 예수의 12사도가 모두 남자였을까?’ ‘최후의 만찬이 여자들의 최후의 만찬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그림을 통해 제기한다. 그는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사회운동가로서 주요 미술관에서 여성 미술가들이 배제되는 현실에 맞서 싸운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평생 페미니즘 사상과 휴머니즘을 담은 작품을 그려낸 메리 베스 에델슨은 우리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거장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닐까?

17세기 이탈리아의 여성 거장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나 18세기 프랑스의 여성화가 마담 르 브룅은 미술사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재조명되는 화가들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재능 있는 여성 화가들이 오랜 성차별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여전히 미술 시장에서 성차별은 존재하지만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이들을 소환하고 재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거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화가도 있다. 폴 고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의 그림들은 시대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 고갱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섬에서 10대 아동 청소년들을 성적으로 착취한 범죄자에 가깝다. 그는 식민주의와 인종우월주의로 가득 찬 인물이었고, 자신의 그림 속 인물들을 ‘야만인’으로 부르며 멸시하고 혐오했다. 말년에는 자신이 심각한 매독에 걸린 것을 알고서도 13, 14세의 소녀들과 성관계를 맺어 병을 옮겼다. 과연 고갱의 예술적 성취가 그의 행동에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미성년 여성을 성 착취한 개인으로서의 고갱과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 사이에서 우리는 그의 자리와 작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편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는 물론이고 캉탱 마시와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걸작 외에도 못생기거나 기괴한 형상을 한 사람들을 그린 작품을 남겼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못생김’은 하늘이 내린 벌이나 악의 표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캉탱 마시의 「추한 공작부인」은 늙고 못생긴 여자의 허영심을 풍자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신 연구에 따르면 그림 속 기괴한 여성의 모습은 질환으로 인한 얼굴의 변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추한 공작부인」은 여전히 ‘추한’ 공작부인을 담은 그림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한 못생긴 사람들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그리고 붙인 그림의 이름은 「그로테스크한 머리」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봤을 때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로테스크한 머리」는 명화가 될 수 있을까?

사실 미술 작품은 예술가의 개성과 미학의 산출물이지만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투영이기도 하다. 그림 역시 사회의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림을 보는 관점이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에서 다시 한번 그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때는 칭송받았지만 지금은 비판받아 마땅한 그림들, 한때는 추앙되었으나 지금은 비난받아 마땅한 화가들. 물론 현재 시점에서 몇 천 년 혹은 몇 백 년 전의 작품이나 화가를 판단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나 삶의 본질,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가치 같은 것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불평등은 정당한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렇듯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미술 작품은 결국 우리가 세상을 더 넓게,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존재 이유이며 미술의 쓸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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