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기억전쟁의 단면을 살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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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기억전쟁의 단면을 살피다
  • 김백철 계명대·조선시대사
  • 승인 2023.05.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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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정조의 군주상: 허상과 실상의 경계』 (김백철 지음, 이학사, 485쪽, 2023.04)

 

정조시대의 인식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여 새로운 관점하에 개혁의 시대로서 비정되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민주화라는 토대 속에서 18세기사가 긍정적으로 재평가된 것이다. 동시에 정조의 사친 사도세자가 비운을 맞이하였기에 극적인 효과가 강조되어 핍박받는 왕세손의 이미지가 창출되었고, 정조대는 재위만년까지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미완의 시대로 평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정조는 약자이기는커녕 즉위와 동시에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반왕세력으로 오인되던 노론 벽파는 실제로는 정조의 지지세력인 청류 중에서 최대규모를 자랑했으며, 벽파의 영수 심환지조차 인사권과 병권을 십수 년간 독차지하며 왕의 측근으로서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반왕파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철저히 숙청했다. 단지 왕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었으므로 이는 그들이 비판적 지지자였음을 의미한다. 2000년대 정조의 비밀어찰이 발견되자 국왕과 심환지의 긴밀한 관계도 명백히 드러났다. 

미완의 개혁이라는 평가는 대개 정약용으로 상정되는 남인이나 영남에서 전해지던 정조 사후의 실각이라는 경험을 이입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시파는 정조 사후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에도 정승으로 기용되었고 수렴 이후에는 정권창출에 성공하여 붕괴되지 않았다. 또한 남인조차 내부의 서학세력만 제거되었으며, 영남인은 오히려 출사가 증가하였다. 실각에 대한 통념은 채제공 계열(정약용 등)의 몰락을 지나치게 시파·남인·영남인 전체에게 확대 적용하여 감정이입을 한 결과였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소론·남인, 그리고 시파·벽파 모두의 군주였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실각하자 단독집권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경종-영조-정조대에 남인 등용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특히 영조는 남인 등용에 각별히 신경을 썼고, 덕분에 제3당에 불과하던 남인이 정조연간에는 정승의 반열에 이르렀다. 그중에는 영남 남인도 포함되었다. 무신란 혹은 신유박해에도 불구하고 남인·영남인의 등용 자체가 중지된 적은 없었다. 19세기에 서서히 영남 차별 인식이 등장하였는데 정조의 훙서와 자신들의 실각을 동일시함으로써 마치 정조와 남인(혹은 영남 남인)을 운명공동체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국왕에게 남인은 여러 지지 세력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최대 세력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군주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서 소수 정파를 포용한 것이다. 이에 정조연간 다양한 영남 우대정책이 펼쳐졌고, 이를 기화로 영남이 사도세자 신원을 적극 주장하여 정조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500년간 영남인 과거 급제자는 한성을 제외하면 전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한성은 수시로 시험을 보기 때문에 지방에서 응시하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한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또 영남만큼 많은 과거 급제자가 나온 곳이 평안도이다. 전국 1-2위를 점하는 양도에서 유독 차별론을 주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8세기는 서북인·영남인 등용 정책을 적극 펼쳤지만 500년 중 유일하게 등용이 약간 줄어든 시기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탕평군주들이 전국 인재를 고르게 선발하면서 과거를 독점하던 경상도·평안도의 비중이 줄어든 결과였다. 심지어 18세기 탕평정치기보다 19세기 세도정치기 영남인의 등과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한편 실학에 대한 관점은 중층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학 담론에 대해 현재 알려진 통설은 대개 1930년대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기념한 『여유당전서』의 간행과 그로 인한 조선학운동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조정은 무능하여 패망했으나 재야의 지식인은 근대사회를 예비하고 있었다는 희망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일본 에도시대 고학파의 편협한 반주자학 논리가 실학의 주요 개념으로 전제되었다. 하지만 주자는 중국 학계에서는 훈고학과 이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청대 고증학자나 조선의 실학자가 공히 주자를 존중하는 글을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 에도시대 고학파만이 주자학의 전체 규모를 인지하지 못하고 한당유학(훈고학)을 계승하면서 신유학(주자학)을 비판한다고 자평했던 것이다. 

결국 일본제국 관학자인 다카하시 도루가 조선은 주리론·주기론의 공리공담으로 붕괴되었고 그 책임은 노론에게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답습한 것이다. ‘실학’ 용어도 본래 유가의 보통명사이지만,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를 필두로 문명개화론을 펼친 이들을 통해 재수입되면서 근대국가에 필요한 실용학문으로 재인식되었다. 한말 일본식 실학 개념을 수용한 이들이 친일단체로 전환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러한 실학 개념은 불행히도 일본제국의 문명화 논리를 배경으로 깔고 있으며, 그들이 보는 주자학에 대한 선입견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실학자로 분류되는 이들 중 유형원의 글은 모두 조정에서 17세기 정책으로 채택하거나 18세기 정책입안 시 주요한 자료로 활용한 바 있다. 정약용은 18세기 정조대 관료생활을 통해서 정책입안에 참여했으며, 그가 남긴 개혁안은 19세기 고종대 적극 채택되었다. 재야학자의 개혁안이 조정에서 채택되지 못했다는 기존 주장과 전혀 다른 사실이다. 또한 대중적으로도 대한제국기 근대국가 건설의 청사진으로 유형원이나 정약용의 글을 ‘경세학’으로 신문에 소개하고 적극적으로 알리는 작업을 시도했다. 따라서 일본의 실학 개념이나 조선학운동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실학자의 성과는 이미 조정에서 채택하고 있었고, 고종대는 더욱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적극 수용해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망의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사실은 잊힌 채 마치 실학이 수용되지 못하고 근대국가 전환에 실패해서 패망한 것처럼 다르게 기억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의 잘못된 전승은 일종의 ‘기억전쟁’을 방불케 한다. 따라서 정조시대의 재조명은 현재의 시각, 18세기 역사상, 정조 사후 후대인의 기억 등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백철 계명대·조선시대사

계명대 사학과 교수. 대표 저서로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2010), <<두 얼굴의 영조>>(2014), <<법치국가 조선의 탄생>>(2016), <<탕평시대 법치주의 유산>>(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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