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흑묘백묘론’의 선결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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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흑묘백묘론’의 선결 조건
  • 이창민 한국외국어대학교·경제학
  • 승인 2023.05.2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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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중국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76년)으로 불리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얼핏 들으면 문화와 혁명이라는 단어의 나열이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지만, 사실 문혁(文革)은 마오쩌둥과 그의 지지자들이 정적을 제거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엄격한 고수를 강요한 집단적 광기에 지나지 않았다. 문혁이 처음에 내세운 표면적인 구실은 낡은 중국의 사상, 문화, 풍속,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과거 중국이 몇 차례 경험한 분서갱유(焚書坑儒)나 문자의 옥(文字之獄)과 같은 반달리즘(vandalism)으로 귀결되었다.

문혁을 거치면서 중국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중국의 국내총생산의 경우 문혁 기간 동안 연평균 성장률이 1.3%에 불과했으며, 1966~70년에 산업생산은 매년 평균 12.6% 감소하고, 농업생산 또한 같은 기간 동안 매년 평균 5.5% 감소했다. 결국 문혁 이전 세계 5위 수준이던 중국의 경제력은 문혁 이후 9위로 떨어졌고, 1980년경에는 11위까지 하락했다. 대학이 문을 닫고 지식인들이 박해를 받으면서 교육과 훈련 부족으로 인적자본 형성에도 공백이 발생했다. 중등교육을 받는 학생수가 50% 이상 감소했고, 문맹율은 상승했으며 100만 명 이상의 지식인들이 중국을 탈출했다. 이러한 인적자본의 감소가 중국경제에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혁명이니 공산주의 같은 사상학습에 피폐해진 인민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1979년에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그는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쥐만 잡을 수 있다면(인민이 부유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다는 덩샤오핑의 철저한 실용주의는 중국 인민들이 당면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결과적으로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가난한 나라였던 중국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던 덩샤오핑이 제시한, 자본주의적 요소를 수용한 것과 같은 실용주의 노선이 현실 정치에서 인정받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19년 5월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 국빈 방문했을 때, 아베는 말 그대로 지극정성을 쏟았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아베를 트럼프의 관광 가이드로 비유했고, 일부 국민들은 비굴한 아베의 모습에 비난을 쏟아 내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한때 적국이었던 미국의 편에 서서 안보를 의존하는 대신 경제발전에 힘써온 역사가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리더가 노골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베는 자신에게 부정적인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철저히 전략적으로 행동했고, 결국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큰 틀에서 그의 실리외교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일본보다 정권교체가 잦은 우리는 ‘외교의 국내정치화’가 구조적으로 더 발생하기 쉽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진영이 각각 총결집하여 반대 진영의 외교적 노력이나 성과를 무조건 사대주의나 굴욕외교로 폄훼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보수 진영은 몇 끼 중에 몇 끼를 이른바 ‘혼밥’을 했는지 상세히 분석하며,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중국 사대주의, 굴욕외교라고 비난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공수만 교체될 뿐, 상대를 악마화하는 진영논리는 계속 이어진다. 지난 4월 백악관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한 윤석열 대통령을 두고 진보 진영은 미국 사대주의라며 비꼬았고, 12년 만에 복원된 일본과의 셔틀 외교에 대해서도 굴종외교, 구걸외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진영을 떠나서 한국의 국익을 위해 실용적인 노선을 견지해야 한다는 한국판 ‘흑묘백묘론’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실리’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북한 문제나 경제 측면에서 중국을 무시할 수도 없고, 경제, 안보 측면에서 미국과 일본이 중요한 파트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계속해서 상대방과 토론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양 진영이 모두 상대방의 외교적 노력이나 성과를 굴욕, 굴종, 사대주의라며 비난한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굴욕이며 굴종이라는 것일까?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굴욕이라 하더라도 만약 우리에게 밤톨만한 이익이라도 가져다준다면 그 정도 굴욕쯤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않을까? 굴욕은 지극히 감정의 영역이고 외교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한신(韓信)이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아낸다는 뜻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은 실리외교를 중시하자는 뜻으로 종종 인용된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둘러싸고 몇몇 언론에서 사대주의 외교라는 비판이 일자, 그는 한신의 고사를 인용하며 본인의 심경을 에둘러 표현하였다. 당시 많은 우리 국민들이 그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설명과 납득의 과정은 매우 어색하다. 한미 정상이 만나는 것이 왜 사대주의이며, 왜 치욕을 참는 일인가? 가령 그렇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무슨 큰 문제가 될까? 앞으로 우리 외교에서 과하지욕과 같은 표현은 없어져야 한다.

진영에 상관없이 외교적 성과는 철저히 실리적인 계산 위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무익외교, 무능외교라는 비판은 가능해도 사대주의, 굴욕외교라는 비난은 사라져야 한다. 우리 국민들도 더 이상 실체도 모호한 민족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레토릭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인 리더보다 기업과 가계에 실익이 되는 결단을 내린 리더가 존경받는 분위기가 될 때, 한국판 ‘흑묘백묘론’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쉬워질 것이다. 


이창민 한국외국어대학교·경제학

한국외국어대학교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 전공은 경제학이며 주로 일본의 근현대 경제, 일본 기업과 경영, 그리고 한일경제관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지금 다시, 일본 정독』, 『아베노믹스와 저온호황』을 지었고, 『주저앉는 일본, 부활하는 일본』, 『복합 대전환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찾아서』, 『대전환 시대의 한일관계』 , 『아베 시대 일본의 국가전략』 등을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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