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적 민주화’와 그 후유증의 극복
상태바
‘타협적 민주화’와 그 후유증의 극복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5.27 16: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민주화 후유증: 가지 않는 과거, 오지 않는 미래 | 김욱 지음 | 개마고원 | 324쪽

 

끔찍했던 군부 통치를 청산하고 정상적 민주시대의 문을 연 지도 어언 30년. 그런데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상은 정작 어떤가? 제각기 진영에 갇혀 극단적 갈등과 분열로 고통받고 있는, 혐오와 증오의 적대 정치에 몸서리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만 한가득이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잘못됐길래 이 모양 이 꼴인 걸까. 이런 현실에 무엇보다 가장 큰 책임이 있을 국힘과 더민 두 진영은 그럼에도 오랜 동안 면면히 그리고 이 순간에도 서로 치고 받으며 끄떡없이 존재한다. 이 지긋지긋한 우리 정치상황에서 먼저 확인되는 것은, 현재의 자기 권력을 위해 상대에게 맹목적 반감을 불러일으켜 얻은 추한 부당이득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적대적 공생체제’다.

서로 적대하는 두 세력이 “퇴행적·위선적인 강성 이데올로기로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상적인 민주체제의 발전이 만성적으로 저해”(207쪽)되는 이 현상이야말로 ‘민주화 후유증’이라 부를 만하다. 이상적·혁명적 민주화였다면 아예 없었거나 짧게 겪었을지도 모를 후유증 말이다.

저자는 우리의 ‘5공 청산’과 ‘민주화’ 역사를 꼼꼼히 되짚어봄으로써, 이 후유증이 ‘타협적 민주화’라는 우리 민주화 역사의 근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직선제 개헌 요구로써 6 · 29선언을 받아내고, 군부 일원의 집권 연장일망정 이를 쿠데타가 아닌 선거로 허용했으며, ‘5공 청산’을 강제해 청문회를 끌어내고, 민정당세력 타파 압박을 3당합당이란 출구로 열어가는 등등에 모두 절묘한 타협 과정이 있었음을 직시한 것이다. 즉, 우리의 민주화는 민주세력의 지난한 비타협적 투쟁으로 마침내 이뤄낸 승리가 아니라 민주세력과 반민주세력 간 힘의 균형점에서 어렵사리 일궈낸 ‘타협적 민주화’라는 것이다.

이런 통찰은 우리 민주화에 대한 그간의 일반적 · 상식적 관점의 일대 전환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1990년 김영삼의 ‘3당합당’을 야합이자 배신으로 매도해온 건 우리의 민주화가 ‘타협적 민주화’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로, 매우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왜? “3당합당은 6 · 10항쟁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자, ‘전두환 5공 청산’이라는 민주화 과업의 일환을 타협적 방식으로 해결해낸 역사적 사건”인 때문이다. 집권 중이었던 노태우의 민정당이 전두환의 민정당과 단절하는 자기 부정을 거쳐 민자당을 탄생시켰고, 그 민자당의 김영삼은 5공 잔재를 일소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민주화 진전에 당당히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재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결정적으로는 정치 ‘제도권’과 온 국민이 참여한 민주적 · 합헌적 선거를 통해 민주화를 이뤘으며, 그런 의미에서 심지어 반민주세력도 타협적 민주화의 한 축이었다”는 점이다. 우선, 그 타협적 민주화가 운동권의 투쟁과 혁명이 아닌 “제도권 정치인들의 주도적 타협으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정상화하는 개헌과 국민의 선거참여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민주화의 실체적 내용과 관련해 이른바 ‘운동권’ 이념은 아무런 기여도 한 게 없으며, 따라서 타협적 민주화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운동권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국민’임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일부 더민당 운동권(출신 및 지지)세력은 마치 민주화 공로를 독점해 마땅한 양 독선적 행태도 마다 않아왔다.

그들 운동권이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가 전혀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투표 행위로써 민주주의 헌법이념을 정상화해가는 타협적 민주화의 과정에서, 그 주역은 어디까지나 일반 국민이었지 운동권이 아니었단 것이다. 그런데도 운동권세력이 스스로에게 과도한 논공행상으로써 민주화 공로를 독선적으로 독점하려는 행태를 보이는 것은 도덕적 우월감에 젖은 오만함을 넘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에 다름 아니다. 제대로 따지자면, “국민이 그들에게 해준 유공자 대우는 이미 차고 넘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화의 한 축 민자당을 승계한 국힘은 따라서 민주화에 대해 자폐적 콤플렉스를 가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해 “민주정당으로서 불완전한 부분을 채워 역사적으로 희미해진 민주적 정통성 · 정당성을 복원 · 강화해야 한다.” 이로써 민정당 승계로 간주해왔기에 국힘을 거부해왔던 명분도, 호남의 더민당 일당지배를 합리화할 명분도 무의미해질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힘도 호남이 복수정당제의 경쟁마당에서 표를 줄 수도 있는 정당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타협적 민주화를 수용함으로써 그 필요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충분조건은 물론 스스로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일이겠지만. 이렇게 “우리가 ‘타협적 민주화’의 긍정적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고 선의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만성적 후유증도 이내 극복”할 수 있음을, 저자는 우리 정치 현대사의 고비고비를 되짚어가며 세세히 밝혀놓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